2018.09.30_[교리]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

본문

(요일 4:1~3)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한줄 요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예수님이 교리의 핵심

오래된 베스트셀러 중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습니다. 맨 앞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는 첫날부터 이해하기 쉬운 말로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운다. 선생님은 ‘간단한 규칙’이라며 가르쳐주지만, 사실 이것들은 인간이 힘겹게 싸워 얻어낸, 온갖 시험을 거친 인간 행위의 규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은 규칙을 배운 뒤, 곧 실습을 하게 된다. 학교가 매일 배운 것을 연습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교리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간단하게 배우는 교리가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매우 힘들게 발견하고 지켜온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배운 것만 잘 기억해도 좋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탓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탓하고 싶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지 모릅니다.

이 책에는 죽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목사로 일하던 시절,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하면 늘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 병원에 다녀왔는데, 의사가 저더러 시한부 인생이랍니다.”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뭐라고요? 그걸 몰랐습니까? 나이도 적지 않은데 그 말을 들으려고 의사한테 돈까지 냈단 말입니까? 유치원에서 작은 컵에 솜과 물과 씨앗을 담아놓고 기다리던 때에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컵 속에서 생명이 태어난 것은 기억합니까?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돋았지요.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식물은 죽었어요. 죽었단 말입니다. 삶은 짧습니다. 그날 자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파서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었나요?” 끝내 그렇게 말은 못하고 생각만 했다.

정말 중요한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면할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과 그 사실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1. 영을 다 믿지 말라

먼저, 성경에서는 신앙적인 영역에도 속이는 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의하라는 얘기입니다. 영적 사기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는 진실한 사람이고, 절대 사기꾼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맹세하라면 맹세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상담한 분 중에는 신천지에게 성경 공부를 배웠는데, 그 사람이 절대 신천지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혈서까지 쓰겠다고 장담했는데, 결국 신천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선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귀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즉, 그 거짓 선지자도 속고 있는 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자기 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내가 보고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했답니다. 거기서 예배드리고 애기를 나누어 보니까 수원 교도소에 억울한 사람만 있지 죄인은 하나도 없는 것 같더랍니다. 재판정에 가면 모두 자기는 선한 사람이고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재판관이 그런 사람 주장을 믿고 재판하면 엉터리 재판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주장만을 믿으면 안되고 드러난 증거과 증인의 증언, 사겅의 정황을 두루 살펴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 재판장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결국 내가 분별하고 내가 그 분별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속았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너무 헷갈립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비신앙인들이 큰 도움을 줍니다.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뉴스 탐사 프로그램에서 알려줍니다. 비신앙인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볼 때 상식 이하라고 생각되는 신앙인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세상 뉴스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을 비판하는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아. 정직하게 장사하면 돈을 어떻게 벌어.”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융통성이 없어 뇌물을 안 주면 사업을 어떻게 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을 받는다고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교회다니는데 나보다 더 썩었어. 사기꾼이야”라거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공사 대금을 주지를 않아.”라는 비판을 받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양심이 살아납니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의 기준이 비신앙이보다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장갑을 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과 장갑을 안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자유롭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비양심이라는 장갑을 벗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담대하게 죄악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한 때,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의 다음과 같은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도 있고, 일부를 영원히 속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링컨)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당대에 대단한 인기와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대의 평판과 명성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

이단 중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단과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영이라는 이단입니다. 정통 교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가 살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영은 고귀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주장입니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체를 갖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육신과 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은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the sinful nature, 즉 죄악된 본성입니다. 헬라어로는 ‘사르크스’라고 해서 몸을 가리키는 ‘소마’와 다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도박에 중독된 사람을 도박하지 못하게 하려고 손을 자르면 어떻게 될까요? 도박을 안할까요? 영화에서 보니까 손에 갈고리를 끼고도 도박을 하더라구요. 손이 무슨 잘못입니까? 마음이 잘못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육신은 오염된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오염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죄를 괴로워하는 감각이 무뎌진 마음이 육신입니다.

가끔 보면, 귀신을 쫓아 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온전하게 거룩하셨습니다. 육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 중립적입니다. 몸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제한된 육체에 갇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구더기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더기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지에 파송된 선교사들 혹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많이 묵상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고 합니다.

3. 예수를 시인하자. 삶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외치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믿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구호가 안 통하게 되었습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처음 언급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학장이 마지막에 당혹스러운 말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네.” “네?”

“걱정 말게. 인내심을 가져. 시간이 지나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될 걸세. 눈을 뜨고 살게. 판단은 유보해. 쓸모 있은 사람이 되게.”

이 책의 저자는 목회자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아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는 핵심 습관이 있습니다. 핵심 습관이란 용어는 제가 고영성 작가의 ‘처음에 누구나 걷지도 못했다’에서 보았습니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2010년 KBS에서 신년기획으로 ‘습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습관에 대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안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제보를 받아 이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그 잘못된 습관을 교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20세 대학생이었던 ‘김△리’ 씨는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김씨의 잘못된 습관은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깔끔한 외모와 20세 여대생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방은 너무 지저분했죠. 스타킹, 잠옷 등 일주일 동안 입었던 옷들 이 침대 위에 널 부러져 있었고, 책상은 폭탄을 맞은 듯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쓰러져 있어 공부하고 책 읽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쁜 습관을 프로그램에참가한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그 결과 방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해졌고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그런데 김씨가 제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았던 이유는 단순히 잘못된 습관을 고친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계획을 세우면 모두 실패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목표를 세우면 행동에 변화를 주어 이룰 수 있겠다’, ‘스스로 많이 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다른 습관도 고쳐지는 파급 효과가 큰 습관을 가리켜서 ‘핵심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핵심 습관’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자기 성찰’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핵심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이유는 육체로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18.05.06_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본문

요한일서 1:8~10 / 2018년 05월 06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한줄 요약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개요

박진영이 구원파라는 방송이 나오면서 구원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왜 구원파가 이단인지 알고 싶어하더군요. 이단에 대해서 잘 알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을 연구한다고 해서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위조 지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위조 지폐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위조 지폐가 나오기 때문에 다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효과적인 방법은 진짜 지폐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진짜 지폐가 아닌 것을 위조 지폐로 판정하면 됩니다.그렇다고, 위조 지폐에 조금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위조 지폐를 알고 있으면 판별이 쉬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에 대해서도 많이 알 필요는 없지만, 대표적인 이단에 대해서 조금 알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왜 이단인지 조금 설명드리고, 참된 기독교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구원파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사용하는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으셨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여 매년 지키면서 어떻게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영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사실일까? 구원받은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성경에는 그런 걸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같이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디모데나 루디아같이 그런 극적인 경험이 없이 조용히 예수님 믿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둘째, 구원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

한 번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회개(metanoeo)와 자백(homologeo)을 구분한다.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단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일상적인 죄들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요한일서 9절을 근거로 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 성경에 정말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고 자백은 반복해서 하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위의 요한일서 9절을 검토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자백”은 사실 구원파가 주장하는 “회개”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불의(adikia, 여성형 단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불의”는 의롭지 못한 개별행위들(복수)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의 뿌리인 “불의”(단수)인 것이다. 이렇게 “자백”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이건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었다. 이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결과적으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거듭나고 구원받는다.

구원파에서는 회개의 고된 투쟁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깨달음만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느끼는 비참함, 자신이 지옥에 가 마땅한 존재라는 전적인 승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한 뜨거운 감사를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사람들이 구원파에 빠지는 이유는 쉽고 단순하고 죄책감을 제거한 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원파에 빠진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얼핏 들으면 정통 교회와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철저히 오해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 칭의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의가 주어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가 단번에 완전히 없어져서 이제부터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가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형벌을 면제받았다고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벌을 면제해주시고 의인으로 선언해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파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회개, 즉 칭의의 회개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지도 않고 우리의 경험에 맞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였고 다윗도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죄성이 남아 있고 죄와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죄와의 싸움은 매우 가치있는 경험입니다. 그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에 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3. 주의할 점

주의할 점은 정교도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은 립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통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도 죄책감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매우 쉽고 단순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체험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좀더 확실한 구원 체험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좀더 안전한 구원 체험은 한 마디로 죄의 각성과 십자가 체험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라는 처절한 인식을 하지 못했다면 그 체험을 위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방언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사를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의 각성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저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 모르는 것이라는 신조로 신앙 생활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게 냉철한 기준을 세우고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구원파는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구원 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인본주의를 믿고, 죄를 지어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 없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백퍼센트 지옥에 갑니다.

참된 기독교는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선고를 인정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전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