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01~23
2017년 11월 1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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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한줄 요약]
아삽은 구약 시대에 이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개요]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시편 50편을 통해서 추수감사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50편은 맨 마지막 구절이 찬양 가사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다 아시는 분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감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독특한 시편이면서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면 놀라운 시편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0. 아삽에 대해서
먼저, 이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삽은 다윗의 3악사 중 한 사람(대상 5:17, 19, 16:5)으로, 다윗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시편을 편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시편에 12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삽은 찬양팀장이었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다윗 동반자였습니다.
아삽의 첫 등장은 다윗 왕이 법궤를 옮길 때였습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에게 빼앗결다가 돌려받은 법궤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놓여있었습니다. 사울은 별 관심도 없었고 20년이 흘렀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가 거기 있는 것이 내내 속상했기 때문에 왕궁 한곳에 성막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가 성막으로 돌아오던 날, 다윗 왕은 마치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삽이 등장합니다(대상 5:17, 19, 16:5).
법궤는 레위 지파 외에는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손조차 대서도 안 됩니다. 다윗 왕은 레위 지파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성막과 법궤를 지키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게 된다. 레위 지파의 존경받는 어른들은 많은 사람을 추천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 헤만, 에단과 함께 아삽을 추천했습니다. 아삽은 찬양대에서 놋제금(구리 심벌즈)을 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날, 아삽과 찬양대는 환호성을 지르는 이스라엘 군중 사이로 행진하며 연주를 했습니다. 법궤가 안치된 후 레위 지파로 꾸려진 찬양대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찬양대장이 바로 아삽이었다.
아삽의 역할은 다윗 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때도 아삽과 찬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금과 비파, 수금, 나팔을 연주하는 제사장만도 120명이나 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서 제사장들이 서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아삽 자손들은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에 등장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었습니다. 그때 무기력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용기를 북돋우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이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됐을 때는 성전이 황폐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전 왕들이 성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과 함께 성전 문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도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훼방꾼들의 방해 공작을 견뎌 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했을 때, 성벽 봉헌식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 역시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속도에 발맞추는 영광스러운 삶이었고, 그의 자손들 역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때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습니다.
1. 1~6 : 하나님의 재판정
그런 아삽이 쓴 이 시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준비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여시는 모습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19에서
[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말씀처럼 천사들과 함께 아합 왕을 심판하려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재판정에 참가해서였습니다.
[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의 재판정 모습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4장입니다.
[4:2~4]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나 나라를 심판하실 때 즉흥적,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하십니다.
2. 7~21 : 두 가지 기소 제목 – 형식적 신앙과 위선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시가 쓰여진 3천년 전에는 잘 이해가 안되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재판정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검사가 재판장 앞에서 죄인의 죄를 들추어내고 그래서 어떤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소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죄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죄인데,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죄인데, 위선으로 사람들을 대한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절을 보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제물을 물질적인 면에서 욕심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제물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22~23 : 감사로 제사 드리라
세 번째 부분은 결론이면서 권면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구약 시대였기 때문에 제사의 형식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은 아삽이 아무리 다윗의 측근이라고 해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대하게 감사가 제사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아삽은 제사가 결국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레 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레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 사람들도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삽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삽을 중용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아삽만큼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인용 -곽선희 ‘이 사람의 감사’>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듣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정확하게 어떤 점에서 은혜를 받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참을 생각해 보니, 진정한 감사는 자신을 보게 될 때 터져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편안할 때보다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느낄 때 더 진실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됨, 어리석음, 연약함을 똑똑하게 보게 되면 그럼이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