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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꿈 꾸지 않은 요셉
창세기 37:1~36
인생에서 예상치 못했던 환란이 찾아와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큰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오늘 본문은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본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못 이해되고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요셉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비전의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이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꿈과 비전을 갖고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약간의 감동을 줄 수 있겠지만, 성경이 주는 참된 감동에는 결코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의 가르침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꿈 꾸지 않은 요셉성경 본문을 신중하게 읽어보면 요셉은 흔히 말하는 ‘꿈꾸는 사람’, 다른 말로는 ‘비전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요셉은 꿈 혹은 비전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변에서 걱정스런 눈으로 보게 되는 철없는 청소년에 가까웠습니다.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하는 청소년이었습니다. 고자질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요셉이 하는 고자질은 차별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특별히 빌하와 실바의 자식들의 잘못을 고자질 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들에 대해서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요셉이 배려심이 없었고 지혜롭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고 자란 환경이 이런 어리석은 행동의 원인이었다는 것도 이어진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요셉의 어리석음은 꿈 사건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요셉의 꿈은 요셉이 능동적으로 꾼 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꿈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자신을 질시하는 형제들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하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어리석은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위기의 야곱 가족본문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비전의 사람으로서 요셉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의 편애로 인해서 상처받는 야곱의 자녀들과 요셉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서 분노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이 부분에서 구속사의 계승자인 야곱의 가족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벼랑 끝에 서있는 듯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형제 간의 갈등이 점차 깊어져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야곱은 자기 가족의 심각한 위기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곱 가족의 상황은 형제 간의 불화와 분노가 도를 넘어서 형제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커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에 있었습니다.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요셉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꿈의 의미는 요셉이 비전의 사람이라는 영웅담의 근거가 아니라 야곱 가문의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개입 사건이고, 언약의 후손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현이었습니다.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요셉의 꿈은 이후의 사건 전개와 연결해서 다른 각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요셉이 앞으로 겪어야 할 쓰디 쓴 배신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요셉이 그 고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소망으로 주신 꿈으로 말입니다.장차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터인데, 그것은 야곱 가문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간의 불화의 원인이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와 요셉의 눈치 없는 행동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떠나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요셉은 야곱의 과잉보호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형제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셉을 죽여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하는 충동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야곱 가문은 야곱과 요셉, 그리고 형제들의 죄성으로 인해서 비극과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요셉이 죽음의 위기에 빠지고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 것은 뜻하지 않은 환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야곱 가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었던 것입니다.노예로 팔려가는 요셉은 앞으로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아버지 야곱에게 배운 믿음을 잘 지키면서 지혜롭고 정직하게 성장해 갑니다. 자기 중심적인 철부지가 상급자를 지혜롭게 섬기고 죄수들을 배려하며 겸손하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자로 변신한 것입니다.결국,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처럼 존귀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곱 가문의 구원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야곱 가문은 아름답게 우애가 회복됩니다. 요셉은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 질시로 인한 비극을 회복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비하와 승귀를 통해서 불화를 끝내고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비전의 사람’이라고 포장하여 영웅담 혹은 성공담으로 가르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인생 성공비결로 바꾸는 잘못된 해석이 될 것입니다.
환난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인생의 환란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자기 중심적인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죄악 된 성향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비극은 우리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의 잘못을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신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비극을 선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불화를 화해로 바꾸는 참된 능력이 되십니다.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비전을 가지고 꿈을 이룬 위인의 이야기나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영웅담으로 격하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로 대치하려는 유치한 시도입니다.요셉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환난과 고통, 미움과 사랑, 희생과 회개의 다양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고 나의 죄악 됨을 돌아보게 됩니다.요셉은 꿈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꿈을 꾸셨습니다.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가족이 회복될 꿈을 말입니다.환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는 꿈 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꿈을 꾸십니다. 참된 안식이 회복되고 슬픔과 눈물과 애통과 죽음이 없는 나라를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꿈을 따라 갑시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라는 아름다운 꿈을 함께 꾸는 사람이 됩시다.
5-2. 얍복강 씨름의 의미
창세기 32:22~32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영적 체험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 체험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영적 체험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참된 영적 체험은 다양한 가운데서도 공통적인 요소를 갖게 마련인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공통적인 요소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있었던 야곱의 씨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왜 이 시점에서 야곱이 씨름하게 되었는가? 둘째,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전통적인 견해는 야곱이 얍복강 나루를 건너서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열심히 기도를 한 것이 천사와 씨름하게 된 계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두 가지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먼저, 야곱이라는 사람의 성품을 보았을 때, 그가 이런 상황에서 기도했다면 그것은 이질적인 행동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대체로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유형 중에서 예를 들자면, 자신을 믿는 사람에 속합니다.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믿고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확실한 대책을 세우려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앞선 구절에서도 야곱의 이러한 현실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예물을 나누어 보내고 일행에게 할 말을 주도면밀하게 일러준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계략을 마련하는데 분주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자신을 의지해서 살던 야곱이 갑자기 기도를 열심히 해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해도 평소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일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이 상황에서 천사(그리스도)가 찾아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야곱이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우 간절히 기도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필연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써 명쾌한 답변이 될 수는 없습니다.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석하다 보면 두 번째 질문, 즉 왜 천사(그리스도)는 반칙을 했는가에 대한 답변은 더욱 필연적이고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맙니다. 그냥 간절히 기도하자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속사적으로 이 상황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즉, 왜 이 시점에서 야곱이 씨름하게 되었는가?구속사적으로 볼 때,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영적 체험을 하게 된 이유는 얍복강 나루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기 때문입니다. 얍복강은 가나안 땅과 외부 지역을 나누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땅’으로서 하나님 언약 백성에게는 중보적 의미를 가진 땅입니다. 즉, 가나안 땅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땅이었으며,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만 하는 장소였습니다.본문에서 야곱은 가나안 땅을 떠났다가 이제 다시 돌아오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야곱에게 가나안 땅이 갖는 영적 중요성을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앞을 막아서고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즉,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이 씨름은 야곱의 승리로 끝나지만,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위골 되는 상처를 받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반칙을 하신 것인지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등 입니다.
이 문제 또한 우리가 구속사적인 관점을 가질 때에야 합당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의 기본적인 부분부터 확인하면서 나아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땅, 가나안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만 하고, 그 ‘믿음’은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믿는 것뿐입니다. 지금 본문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야곱을 막아 서고 계신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땅, 가나안 땅으로 야곱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 섰다가 물러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야곱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드러내는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여주어서 하나님을 이겼을까요? 안타깝게도 야곱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씨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야곱은 초조함과 절박감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은 이 순간입니다. 야곱이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치심으로써 번뜩이는 힌트를 주신 것입니다.
허벅지와 할례언약허벅지 관절은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이삭의 신부감을 찾으라고 보낼 때와 야곱이 요셉에게 자신의 시체를 가나안 땅에 장사하도록 다짐받을 때 허벅지에 손을 넣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창 24:2; 47:29).
[창 24: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창 47: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은 중보자 언약을 기억하도록 유도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비약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오히려 비약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언약적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성경학자들은 사실 허벅지에 손을 넣는 것이 완곡어법이라고 말합니다. 완복어법은 표현을 바꾸어 말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죽는 것’을 ‘조상에게 돌아갔습니다’고 하거나 ‘용변 보는 것’을 ‘발을 가리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허벅지도 완곡어법으로써 남성 성기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원어적으로도 허벅지는 ‘야레크’인데 여기서는 ‘야레크’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우묵한 곳을 가리키는 ‘카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허벅지 관절을 ‘치매’라고 할 때 ‘쳤다’는 단어는 ‘나가’가 쓰였는데, 이것은 ‘손이 닿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합니다. 여기 본문은 ‘카프(남성성기)를 나가(손이 닿다/만지다)했다’입니다. 정리하면, 아브라함과 야곱 모두 중요한 언약을 할 때, 성기 부분에 손을 두고 언약을 했는데 야곱의 얍복강 씨름 과정에서 천사가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아브라함 가족에게는 할례 언약이 있었습니다. 할례 언약은 여자의 후손 언약이 구체화된 것으로써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갖지 못한 야곱에게 할례 언약을 상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야곱에게 할례 언약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믿음을 주신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결국, 허벅지를 친 것은 반칙이 아니라 힌트를 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야곱에게 할례언약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믿음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힌트를 받고 여자의 후손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씨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써 야곱이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을 뜻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도 자신의 설교에서 이 사건을 야곱의 회심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거룩한 상처그리고, 야곱이 허벅지에 입은 상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거룩한 상처입니다. 영적 체험은 결코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홀연히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우리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맙니다. 참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결코 그 전과 같아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영적 흔적이 우리 심령에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흔적을 남기어 우리 내면에서 영원히 흐려지지 않는 빛을 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방편우리는 은혜의 방편인 말씀 공부와 기도 생활, 예배 참석에 힘쓰면서,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 체험이 우리의 공로나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에 의한 선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된 영적 체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마음 속에서 보석처럼 퇴색되지 않는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 인생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한 단계 높은 영적 체험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5-3.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
눅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입니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한줄요약]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기도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요약]사랑과 용서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능력 없는 사람이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용서는 능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위대하고 용기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든 상황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만큼 큰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용서에 왜 능력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던 시절에 지중해 주변 나라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서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라고 불렀습니다. 다양한 민족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도 로마라는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지낸 이유는 무엇일까요?그것은 로마가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살도록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바탕에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 무조건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힘으로 평화조약을 맺을 나라를 굴복시킨 이후에야 평화조약 맺었습니다. 로마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더라도 언제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평화조약이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 지방이 로마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 로마는 많은 전쟁을 통해서 갈리아 지방을 정복했던 것입니다.이렇듯 평화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활동, 즉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치 능력그런데,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싸우지 않는 소극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섬겨주고 잘해주고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적극적인 활동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활동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이 당연합니다.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신 행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두 가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가치 능력과 인격 능력입니다.먼저 가치 능력이란, 능력의 질적 수준을 의미합니다. 무기를 예로 들자면 총과 대포와 미사일이 각각 질적으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귀한 가치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즉, 능력의 질적 수준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받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는데, 이것은 홀로 전 인류의 죄를 감당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만큼의 가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죽었던 모든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었던 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만한 가치를 조금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 값은 전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인류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가 십자가에 달린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 능력그리고 능력에는 능력의 운용에 관련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또한 능력인데 이것을 인격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격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독재자처럼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 명령에 의해서 악행을 행하는 군인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가진 능력이 매우 크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이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능력의 결과라고 주장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완벽하게 격파하는 본문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예수님의 인격 능력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단 지도자들이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인격 능력의 표현입니다. 이단 지도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따르는 이단 지도자의 인격 능력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극한의 육체적인 고통 가운데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격 능력을 지닌 사람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속의 기도구속사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곧 구약 시대 성전에서 대속의 제물이 드려지고 죄인이 속죄함을 받는 것과 동일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는 대속의 죽음임을 아시고 하나님께 죄인들의 사함을 요청 드리는 제물과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올려드린 것입니다.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온전한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동물 희생 제사는 온전한 속죄를 가져오지 못했던 반면에 예수님의 제사는 영원한 속죄를 가져오는 온전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천 년에 걸친 속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서 친히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그 한 없는 사랑뿐만 아니라 희생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심으로 절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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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매료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그분의 가치와 인격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인격 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없습니다. 무가치함과 무정함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분의 공의, 그분의 능력, 그분의 사랑, 그분의 신실하심이 오묘하게 통합된 신적 지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따를 수 없는 십자가의 비밀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오늘 이 시간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격을 덧입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