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

금세기의 대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는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다 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부흥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신학이 철저하게 그의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오히려 최근의 부흥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은사주의운동캠프에 속해있으면서 에드워즈의 글들을 자신들의 신학의 들러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조나단 웨드워즈의 글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아래에 그의 회심간증을 옮겨놓는다. 그가 1737년도에 작성한 것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자신의 회심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려놓고 있다. 그의 회심은 15년전 곧 1721년, 그러니까 자신의 20살때쯤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심간증을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던 싯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고백이 머리요, 신조만으로서의 고백이었음을 그의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되어지고 또한 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생생한 언어들로 대할 수가 있다.

그의 표현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신비주의적 경향(하지만 그의 신학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님을 유의하시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을 잘 지켜서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혹은 그의 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주여, 부흥의 영이시여, 에스겔골짜기의 그 마른 뼈들같은 우리들에게도 부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번역한다.

자료출처: http://www.calltoworship.org/calltoworship/testimony/jonathan.html

Jonathan Edwards “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간증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구원받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내력
I had a variety of concerns and exercises about my soul from my childhood; but had two more remarkable seasons of awakening, before I met with that change by which I was brought to those new dispositions, and that new sense of things, that I have since had.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가진 채로 여러 가지 실행들을 해 왔다.그리고 두 번의 현저하게 주목할 만한 각성의 기간을 두 번이나 거친 후에야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되는 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런 기질들과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The first time was when I was a boy, some years before I went to college, at a time of remarkable awakening in my father’s congregation.

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몇 해 전, 부친의 교회에서 있었던 현저한 각성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I was then very much affected for many months, and concerned about the things of religion, and my soul’s salvation; and was abundant in duties.

그 당시 몇 달 동안이나 그 각성으로 인해서 영향을 입어서는 신앙의 문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는 그것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했었다.

I used to pray five times a day in secret, and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us talk with other boys; and used to meet with them to pray together.

하루에 다섯 번씩 은밀히 기도시간을 가졌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대화들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곤 했었다.

I experienced I know not what kind of delight in religion.

나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모르는 채로 신앙 안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My mind was much engaged in it, and had much self-righteous pleasure; and it was my delight to abound in religious duties.

내 마음은 그것에 깊이 몰두했었다. 또한 무척 내성적이었고 나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I with some of my schoolmates joined together, and built a booth in a swamp, in a very retired spot, for a place of prayer.

학교친구들 몇몇과 함께 습지 안의 한 곳 으슥한 곳에 기도할 수 있는 거처를 지어놓았다.

And besides, I had particular secret places of my own in the woods, where I used to retire by myself; and was from time to time much affected.

게다가 숲속에는 내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장소가 있어서 혼자서 그곳에 가서 때때로 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My affections seemed to be lively and easily moved, and I seemed to be in my element when engaged in religious duties.

나의 정서는 들뜨고 쉽게 감동받는 것 같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빠져들었을 때에는 나의 근원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And I am ready to think, many are deceived with such affections, and such a kind of delight as I then had in religion, and mistake it for grace.

그래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서들에 현혹되어서 내가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그런 종류의 즐거움들 때문에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But in process of time, my convictions and affections wore off; and I entirely lost all those affections and delights and left off secret prayer, at least as to any constant performance of it; and returned like a dog to his vomit, and went on in the ways of sin.

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의 확신과 감정은 닳아져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흥분 속의 쾌감들을 잃어버리고 은밀한 기도시간도 갖지 않았다. 최소한 지속적으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또한 개가 그 뱉아버린 것을 다시 주워먹는 것처럼 죄된 생활들을 반복하였다.

Indeed I was at times very uneasy, especially towards the latter part of my time at college; when it pleased God, to seize me with a pleurisy; in which he brought me nigh to the grave, and shook me over the pit of hell.

물론 때때로 특별히 대학생활의 말기쯤에 와서는 이런 나의 상태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 졌다.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지옥구덩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And yet, it was not long after my recovery, before I fell again into my old ways of sin.

하지만, 회복되자 곧 옛날 저질렀던 죄악으로 되돌아 갔다.

But God would not suffer me to go on with any quietness; I had great and violent inward struggles, till, after many conflicts with wicked inclinations, repeated resolutions, and bonds that I laid myself under by a kind of vows to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엄청나고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악한 내적 경향들과 씨름한 후에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From my childhood up, my mind had been full of objections against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in choosing whom he would to eternal life, and rejecting whom he pleased; leaving them eternally to perish, and be everlastingly tormented in hell. It used to appear like a horrible doctrine to me.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해서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두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But I remember the time very well, when I seemed to be convinced, and fully satisfied, as to this sovereignty of God, and his justice in thus eternally disposing of men, according to his sovereign pleasure.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주권적인 즐거움을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확신하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분명히 기억나기는 한다.

But never could give an account, how, or by what means, I was thus convinced, not in the least imagining at the time, nor a long time after, that there was any extraordinary influence of God’s Spirit in it; but only that now I saw further, and my reason apprehended the justice and reasonableness of it.

하지만,내가 어떻게 혹은 어떤 방편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순간도 없었고 되돌아볼 때에 그런 순간이 있었노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없었다.

However, my mind rested in it; and it put an end to all those cavils and objectio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확신에 안주하고 있었고 모든 의문과 반대에 종지부를 찍었었다.

And there has been a wonderful alteration in my mind, in respect to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from that day to this; so that I scarce ever have found so much as the rising of an objection against it, in the most absolute sense, in God’s strewing mercy to whom he will shew mercy, and hardening whom he will.

그리고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의 면에서 나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대해 보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주시고 거두실 자에게는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justice, with respect to salvation and damnation, is what my mind seems to rest assured of, as much as of any thing that I see with my eyes; at least it is so at times.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며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분명하게 확신되었서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과도 같게 여겨졌다; 최소한 때때로 그렇게 여겨졌다.

But I have often, since that first conviction, had quite another kind of sense of God’s sovereignty than I had then.

하지만, 그 첫번째의 확신 이후로 간혹 아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I have often since had not only a conviction, but a delightful conviction. The doctrine has very often appeared exceeding pleasant, bright, and sweet. Absolute sovereignty is what I love to ascribe to God. But my first conviction was not so.

그 이후로 간혹 하나의 확신으로서만 아니라 달콤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나는 사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 확신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The first instance that I remember of that sort of inward, sweet delight in God and divine things that I have lived much in since, was on reading those words, I Tim. 1:17.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적이면서 달콤한 즐거움, 그리고 그 이후 생활하던 중에 계속 겪었던 신성한 일들에 대한 추억의 첫 체험은 디모데전서1:17에 있는 말씀들을 읽었을 때였다.

Now un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wise God, be honou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정말로 오직 영원하시며, 영생하시고, 보이지 않으신 왕이시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이 무궁하시길 !

As I read the words, there came into my soul, and was as it were diffused through it, a sense of the glory of the Divine Being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영혼 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확산되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곧 그것은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었다;

a new sense, quite different from any thing I ever experienced before Never any words of scripture seemed to me as these words did.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전 어느 때에 겪어보지 못하였던 너무나도 다른 그 무엇이었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과 같이 여겨지지 않았었다(역자주: 그만큼 새롭게 여겨졌었다는 뜻)

I thought with myself, how excellent a Being that was, and how happy I should be, if I might enjoy that God, and be rapt up to him in heaven, and be as it were swallowed up in him for ever!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분은 얼마나 뛰어나신 존재이신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그 분에게로 환희로 올리워지게 된다면, 그 분 안에 영원토록 삼키워지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I kept saying, and as it were singing over these words of scripture to myself; and went to pray to God that I might enjoy him, and pray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from what I used to do; with a new sort of affection.

나는 계속 말하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계속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계속 즐거워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였었다. 새로운 종류의 정동(情動)이 넘치고 있었다.

But it never came into my thought, that there was any thing spiritual, or of a saving nature in this.

하지만, 이것 안에,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케하는 성질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From about that time, I began to have a new kind of apprehensions and ideas of Christ. and the work of redemption, and the glorious way of salvation by him.

그 어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종류의 인식과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An inward, sweet sense of these things, at times, came into my heart; and my soul was led away in pleasant views and contemplations of them.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내적이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내 영혼은 그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유쾌해지고 깊어졌다.

And my mind was greatly engaged to spend my time in reading and meditating on Christ, on the beauty and excellency of his person, and the lovely way of salvation by free grace in him.

내 마음은 그 분의 인격의 아름다우심과 뛰어나심, 그 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그 사랑스러운 방식에 대하여 독서하고 묵상하느라고 깊이 빠져서 시간을 보내었다.

I found no books so delightful to me, as those that treated of these subjects.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책들 외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Those words Cant. 2:1, used to be abundantly with me,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ly of the valleys.

아가서2장1절의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라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곤 했었다.

The words seemed to me, sweetly to represent the loveliness and beauty of Jesus Christ.

나에게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달콤한 말씀으로 여겨졌다.

The whole book of Canticles used to be pleasant to me, and I used to be much in reading it, about that time.

아가서 전체가 나에게 유쾌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읽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었다;

and found, from time to time, an inward sweetness, that would carry me away, in my contemplations.

그리고는 때때로, 묵상 중에 나를 멀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곤 하던 어떤 내적인 달콤함을 발견하였다.

This I know not how to express otherwise,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than by a calm, sweet abstraction of soul from all the concerns of this world.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그 영혼의 달콤함;

and sometimes a kind of vision, or fixed ideas and imaginations, of being alone in the mountains, or some solitary wilderness, far from all mankind, sweetly conversing with Christ, and wrapt and swallowed up in God.

때로는 어떤 종류의 비젼, 혹은 어떤 사람과도 단절되어서 홀로 산 중에 있거나 외로운 광야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 감싸여서 삼키워지는 것 같은 비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The sense I had of divine things, would often of a sudden kindle up, as it were, a sweet burning in my heart; an ardor of soul,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내가 가졌던 이런 감각은 간혹 사실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내 마음 속에 달콤하게 타오르기도 하였다. 영혼의 그 향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Not long after I first began to experience these things, I gave an account to my father of some things that had passed in my mind.

이런 일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마음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I was pretty much affected by the discourse we had together; and when the discourse was ended, I walked abroad alone, in a solitary place in my father’s pasture, for contemplation.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에 아주 고무되어서 대화가 끝나자 나는 밖으로 혼자 나와서 농장의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기 위해서 찾았다.

And as I was walk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and clouds, there came into my mind so sweet a sense of the glorious majesty and grace of God,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그곳을 걸을 때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I seemed to see them both in a sweet conjunction; majesty and meekness joined together; it was a sweet, and gentle, and holy majesty; and also a majestic meekness; an awful sweetness; a high, and great, and holy gentleness.

장엄함과 겸손함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런 달콤함 결합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또한 장엄한 겸손함이었다. 위엄스러운 달콤함이었고 또한 지고하며 위대한 그리고 거룩한 부드러움이었다.

After this my sense of divine things gradually increased, and became more and more lively, and had more of that inward sweetness.

이 일 후에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더 생동감이 있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이 증가되었다.

The appearance of every thing was altered; there seemed to be, as it were, a calm sweet cast, or appearance of divine glory, in almost every thing.

모든 일들이 변화되었다; 사실 거의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형물처럼 여겨졌다.

God’s excellency, his wisdom, his purity and love, seemed to appear in every thing; in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clouds, and blue sky; in the grass, flowers, trees; in the water, and all nature; which used greatly to fix my mind.

하나님의 뛰어나심, 그 분의 지혜,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이 모든 사물 속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태양 속에서,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 구름 속에서, 그리고 푸른 하늘 속에서; 잔디, 꽃들, 나무들 속에서; 물 속에서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랬다; 이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이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러했다.

I often used to sit and view the moon for continuance; and in the day, spent much time in viewing the clouds and sky, to behold the sweet glory of God in these things; in the mean time, singing forth, with a low voice my contemplations of the Creator and Redeemer.

간혹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신 분을 묵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부르곤 하였다.

And scarce any thing, among all the works of nature, was so sweet to me as thunder and lightning; formerly, nothing had been so terrible to me.

모든 자연의 작품들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에게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둥과 번개조차 그러했다.

Before, I used to be uncommonly terrified with thunder, and to be struck with terror when I saw a thunder storm rising; but now, on the contrary, it rejoiced me.

이전에는 천둥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정반대로, 그것을 보면 즐거워 졌다.

I felt God, so to speak, at the first appearance of a thunder storm; and used to take the opportunity, at such times, to fix myself in order to view the clouds, and see the lightnings play, and hear the majestic and awful voice of God’s thunder, which oftentimes was exceedingly entertaining, leading me to sweet contemplations of my great and glorious God.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천둥번개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을 느꼈다; 그 천둥이 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구름을 보려고 집중해 서는 번개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하나님의 천둥의 그 장엄하고 위엄스러운 음성을 듣곤 하였다. 때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의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는 데로 나를 인도하였다.

While thus engaged, it always seemed natural to me to sing, or chant for my mediations; or, to speak my thoughts in soliloquies with a singing voice.

이렇게 몰두하는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묵상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혹은 노래부르는 듯 혼자서 조용히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아 놓았다.

I felt then great satisfaction, as to my good state; but that did not content me.

나는 그 당시 나의 좋은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지는 않았다.

I had vehement longings of soul after God and Christ, and after more holiness, wherewith my heart seemed to be full, and ready to break; which often brought to my mind the words of the Psalmist, Psal. 119:28.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였고 더욱 거룩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마음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고 넘치는 것 같았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편119:28절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곤 할 정도였다.

My soul breaketh for the longing it hath.

나의 영혼은 원하는 바 그 열망으로 상하여졌다.

I often felt a mourning and lamenting in my heart, that I had not turned to God sooner, that I might have had more time to grow in grace.

간혹 내 마음 속에 보다 더 일찍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음을 애닮아 하는 슬픔과 비애를 느껴서 더욱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 하였다.

My mind was greatly fixed on divine things; almost perpetually in the contemplation of them.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몰두하였다; 그것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묵상하였다.

I spent most of my time in thinking of divine things, year after year; often walking alone in the woods, and solitary places, for meditation, soliloquy, and prayer, and converse with God; and it was always my manner, at such times, to sing forth my contemplations.

거의 모든 시간을 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수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었다. 때로는 숲속 길을 홀로 걸으면서 때로는 나 홀로 있는 장소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명상 중에 찬양이 튀쳐 나오는 것이 나의 생활이었다.

I was almost constantly in ejaculatory prayer, wherever I was.

언제나 대부분 자연스럽게 기도가 터쳐 나왔다.

Prayer seemed to be natural to me, as the breath by which the inward burnings of my heart had vent.

마치 나의 내적 심령의 타오름이 내뿜는 숨결처럼 기도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The delights which I now felt in the things of religion, were of an exceeding different kind from those before mentioned, that I had when a boy; and what I then had no more notion of, than one born blind has of pleasant and beautiful colors.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전의 것은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총천연색깔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갖는 그런 차원의 것이었을 뿐이다.

They were of a more inward, pure, soul animating and refreshing nature.

이제 느끼는 것들은 보다 내적이고 순수하며 영혼의 활력을 주는 신선한 성격의 것이었다.

Those former delights never reached the heart; and did not arise from any sight of the divine excellency of the things of God; or any taste of the soul satisfying and life-giving good there is in them.

이전의 즐거움은 마음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신적인 뛰어남을 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그것들 안에 있어서 그 맛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역주: 이 이후의 기록은 1723년 뉴욕으로 건너가서 목회일을 시작하는 일들이 기록된다. 그의 전기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요약

제 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감정이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을 가진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능은 2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쁘고 애착을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싫어하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감정과 격정을 종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감정’이라는 말은 ‘격정’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에 사용한다. 그러나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며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에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사랑, 갈망, 기쁨, 감사, 희망이 있고 후자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이 있다.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마음이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하는 것은 마음에 행한 할례의 참된 열매이며, 생명의 약속이 있는 참된 거듭남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세상적인 일에서 세상적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근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 문제에서도 종교적 감정이 행동의 근본인 것이다. 감정 없이 교리 지식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만 가진 사람은 진지한 신앙생활이 힘들다.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과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성경은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주 권면되고 진지하게 요구된다.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참된 성도를 구별해주는 특질이며 그 특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그리고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한다. 열정도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자신을 주실 때에 마음에 품고 계셨던 위대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성경은 모든 감정의 원천이며 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랑 안에 참된 믿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었다. 다윗의 경우 시편에서 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다.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믿음과 경건 역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고 활력을 주며 사로잡아서 그들을 강렬한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 속에 존재한다.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마가복음3: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에 완악하기 때문이다(에스겔3:7).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에 완고하면서 악하기 때문이다(역대하36: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에스겔11:19;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이와 반대인 부드러운 마음은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시야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열왕기하 22:19에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팍함과 연결시킨다.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이제는 몇 가지의 추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는 모든 신앙감정을 믿을 수 없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이 땅에 영적 대각성기에 위대한 신앙감정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올바른 성향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감정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때에 많은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높이 고양된 감정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게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교묘한 술수를 보게 된다. 사단은 신앙감정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았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그 감정들이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고 잘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오류는 결국 사람이 감정이 없는 형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신앙감정들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 모든 참된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고상한 감정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 안에 고상한 감정들이 있을 수가 없다. 신앙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경멸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만일 참된 신앙이 대부분 감정에 있다면 감정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경향성을 지닌 수단들을 힘써 구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서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 참된 유익을 주지 못하는 수단들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들이 감정들을 감정을 자극할 수는 있더라도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이나 은혜를 향하는 감정을 자극하지는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 속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그 방법들을 본성에 적합하고 참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 방법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을 더 많이 일으키게 되며 그럴수록 그 방편들은 더 나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참된 믿음의 대부분이 감정 아에 있다는 것이 옳다면, 우리가 믿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그들에게 영혼의 모든 다른 기능들과 원리들을 주신 목적과 같다. 그 목적은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큰 목적 즉 사람의 본분에 봉사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문에 외면적인 쾌락을 위해, 명예와 명성을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그들의 소망은 강렬해지고 욕망은 타오르며 그들의 사랑은 불이 붙고 열정은 강렬해진다. 그러나 과연 영원한 세계인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고 심령이 굳어져 있으며, 강퍅해져 있는지! 그들의 열정은 식어있고 그들의 갈망은 미지근하며, 그들의 감사는 얼마나 부족한지!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면 그리고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감정의 작용이 가장 합당하게 쏟아야 할 대상을 향해 발휘대고 행사되어야 한다. 복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칭찬과 감탄과 사랑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성육신 하시고, 무한한 사랑이 있으시며,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속주의 얼굴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주를 위해서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사랑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첫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강도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높아 졌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오류가 없는 성경은, 매우 높아졌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감정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라디아서 4:15).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한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하다.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그들이 크게 감화되어 찬송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자신의 놀랍게 나타나심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거룩한 언약을 세울 때 관심을 보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잊어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한가? 그가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에는 찬송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고 조롱과 가시 면류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결국은 신앙감정이 높다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2. 두 번째 소극적 표지: 몸의 격렬한 반응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몸은 심리적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엑 특히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적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높아졌음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 생각지 않는다.

3. 세 번째 소극적 표지: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된 감정들은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본질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 이 현상들의 증거다.

4. 네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사람이 지정된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자 기대한다는 것은 타당치 못한 교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 채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열광주의적인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영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 또는 뇌가 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 상상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그 원인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같은 이유로 해서 영적인 인상에서도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잠자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단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표현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이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베드로후서3:16). 우리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본문이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기들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소극적 표시: 사랑의 피상적 표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원문에 ‘부패함 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어도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일곱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정도

거짓된 믿음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온전함과 조화가 없지만,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거짓이 있다.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올라갈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8. 여덟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체험 순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가지의 매우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이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나타나시기 전에 그들이 좌절하는 상태가 되어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편으로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감과 각성을 경험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꼭 회심하는 것이 순서가 확실히 수학 공식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회심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회심자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죄의 자각과 위로를 어떤 방법과 순서대로 하나씩 경험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보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그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의 영적이고 신적인 본질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9. 아홉 번째 소극적 표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우리는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하다못해 어쩛 수 없이 드린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정말 혐오스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경험상,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다른 삶은 생각하지를 않는다. 결국엔 은둔자가 되어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0. 열 번째 소극적 표지: 찬송을 열심히 부름

가장 확실한 한 예를 들자면 출애굽시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는 주님을 향해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잊어버렸다.

소망과 위로 가운데 무가치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자비하심 때문에 감화되어 이 값없는 은혜를 크게 높이며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감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에게 위대한 감정과 존경심으로 찬양하며 높였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리오 왕도 그러했다.

11. 열한 번째 소극적 표시: 자신의 구원 확신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베드로후서1:5-8).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위선자에게도 이런 확신은 있는데 그것이 확고해지면 참된 성도들은 종종 의심하는 일에서도 자기가 품은 소망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된다. 첫째로, 그는 마음이 신중해야 하고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며 자신이 속고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 둘째로, 위선자는 참된 성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소경 됨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더 쉽게 자신들에게 있는 빛과 지식을 더 크게 자만하게 된다.

셋째로, 마귀는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만 위선자들의 소망은 공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그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를 더욱 내리시고, 깊이 품도록 하시고, 삶 속에서 더 엄격하고 부지런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것 같은 시각이 없다. 반성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에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전자는 알마니안주의자들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12.열두 번째 소극적 표시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 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그러나 외형적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얻을 수준으로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는 제일 수준이 높은 사람들 조차도 속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일이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신 원리와 말씀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의 원리를 버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남이 인정한다고 우쭐하거나 자팩할 거 없다.

제 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구별해 주는 표지들

1. 첫 번째 적극적 표지: 성령의 내주

우리는 참된 성도들 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을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자질이라고 말하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영구적으로 거하실 처소인 참된 성도들 안에 거주하신다. 그래서 성도를 자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2:20).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로서 성도와 연합한다.

성도들과 그들에게 있는 미덕들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성도들의 영혼 속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 또는 거룩한 영이라고 부른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셨다고 선포한다는 것과 그것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 참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질은 참된 성도에게 있는 영적인 감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근본적인 객관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의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 속에 참되고 거룩한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영광을 먼저 경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런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랑과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거나 뒤돌아 볼 시간이 없다, 그리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3. 세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형태의 도덕의 의미는 아니다. 거룩함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이나 척도와 무관하고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질들과 관계없는 본성 자체로서 본성을 완성하거나 본성에 어울리는 선을 뜻한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란 의미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속성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선하고, 의롭고, 한없이 마땅하고 사랑스러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시고,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며, 장엄하고 두려운 위엄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기뻐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거룩성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위대하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신성이시며(베스트 오브 베스트)(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근본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데에서 생긴다. 믿음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사역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 전체를 알지 못한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합리적인 확신은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다. 또는 확신할 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를 기초한 확신이다.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낌으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런 확신이 생길 때, 비로소 복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의 신성과 진실성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그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광을 분명하게 보거나 이 초 자연적 감각이 상당할 정도로 생길 때 더욱 그러하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2.이런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더 간접적인 방식이 있음을 말한다. 1)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 되는 말씀에 설득되어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2)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 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돕는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들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대상들의 상호 관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표지: 참된 겸손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일반적으로 대단한 겸손을 가장해서 나타나지만, 영적인 교만을(아마도 보편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런 영적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신앙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이 탁월한 성도이며, 성도 가운데 아주 원숙한 사람이고, 자신이 특별히 선하고 위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로,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된 체험은 보통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바로 거짓된 겸손의 본질이다. 거짓된 신앙감정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체험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한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표지: 성품의 변화

회심은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는다. 회심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에 있는 본성 때문에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심지어 이런 죄들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를 뽑지를 못하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효과로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 있다. 처음 회심 때 체험하는 영적 깨달음과 감정과 마찬가지로, 회심한 후에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모든 깨달음과 감정들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표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본질적이고,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속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9 아홉 번째 표지: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아담이나 하와나 가인 같이 그렇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 되어 있다. 어린 아이는 살만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부드럽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며, 쉽게 영향을 받으며, 쉽게 굴복한다. 영적인 일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경건하고 받드는 것이다. 무서워하는 것은 죄를 지어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서워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10. 열 번째 적극적 표지: 신앙의 균형

성도들이 지닌 진정한 거룩한 감정에는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전체가 각인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성도들 안에 있다. 은혜의 걸맞는 은혜가 있다는 말이다.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형상이 있으며, 이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걸맞다. 그 형상은 참된 형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특징에 걸맞는 특징이 있고, 지체에 걸맞는 지체가 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꼐서 만드신 자연적인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1. 열한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그가 죄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죄를 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에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한다. 그가 죄를 더 애통해할수록,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의 심령이 더 상할수록 심령이 더욱더 상하기를 갈망한다. 그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더 목말라하고 더 갈망할수록, 그는 더 갈망하고 하나님을 매일 찾게 된다.그럴수록 은혜의 불꽃이 타 올라서 온 몸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한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표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이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세상에서 성도의 행위나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둘째, 성도는 그런 거룩한 행위를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성도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한다.

거룩함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전적으로 순종적이라는 평가르 받기 위해서는 그의 순종은 금지의 명령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헌신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한 사업과 같이,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세 번째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나게 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간다. 참된 성도들은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대한 섬김에 진저리가 날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다. 즉 더 이상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는 결코 변절되지 않는다.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에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행사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은혜로운 감정들의 가장 주된 객관적 근거가 신적인 일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거룩하게 행동하게 하는 이유는 모든 거룩한 감정의 토대인 신적인 일들에서 보이는 탁월성 즉 신령한 일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탁월성 또는 아름다운 거룩함에 있는 듯하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실천적인 경향성과 결과를 갖는 것은, 감정들이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행위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다.

거룩한 감정들이 이와 같이 실천적으로 행하고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한 감정들이 겸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은 순복적이고 복종적이며, 순종적인 마음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엄격하고 전반적이며 지속적인 순종을 동반하게 하는 이유는 온유함 때문이기도 하다. 온유한 심령은 참된 성도들의 감정에서 드러나며 도덕적인 악의 존재와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빠르고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전반적이고 지속적이며 끈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에서 흘러 나오는 행위는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룩한 감정들이 거룩한 행위를 향한 진지함과 행동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내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하는 영적 욕구와 갈망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참된 감정을 동반하며 퇴보하지 않고 점점 증가한다.

우리의 삶은 비타민C 같다고 할 수 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갈망하며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신앙이 퇴화하고 죄를 짓는 옛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늘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나누게 되면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단 15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것이 내겐 유익하다.”

우리도 역시 이런 주님이 주신 달콤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출처] changmoolee.tistory.com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도와 위선자가 가지는 기쁨의 차이’

위선자들의 기쁨은 자신들에 대한 기쁨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선을 기쁘고 감격스럽게 자신들에게만 고정시킨다. 소위 영적인 발견이나 체험을 한 후에 그들의 마음은 교만해지고 자신들의 체험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험의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체험인지!’라고 그들은 스스로 계속 생각한다.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현현인지! 내가 경험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온전하심의 자리에 놓는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즐거워하는 대신에, 그들의 찬탄할 만한 체험을 즐거워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참되게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참된 성도는 자신이 보는 바 하나님의 영광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그가 묵상하는 황홀한 대상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체험을 살피고, 그 체험이 아주 큰 업적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 줄 좋은 이야기가 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태만이요 실패다.

그리고 그가 체험하는 즐거움과 기쁨 또한 자신의 안전한 영적 상태나 자신의 특별한 자질, 체험, 정황을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바라보는 대상의 지고한 신적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즐겁게 하며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출처]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부흥과 개혁사), pp. 361-326, p. 363.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에 이르기 위해 구도자가 할 수 있는 열 가지 방편’

  1. 구도자는 자신의 정욕의 외적인 극대화로부터 절제할 수 있다.
  2. 구도자는 어떤 악한 과정과 실천을 개혁할 수 있다.
  3. 구도자는 이웃에 대한 외적인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다.
  4. 구도자는 성경을 읽을 수 있다.
  5. 구도자는 모든 공예배나 기도회에 참여할 수 있다.
  6. 구도자는 자신의 입술을 신앙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다.
  7. 구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즉, 악한 생각에서 생각을 돌려 신적인 일들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8. 구도자는 신앙적인 일들에 자기 시간을 구별해 사용할 수 있다.
  9. 구도자는 주어진 신적인 도움ㅡ즉, 성령의 감동ㅡ을 활용할 수 있다.
  10. 구도자는 자신의 다른 일을 하듯이 이런 일들에 자신의 온 힘을 기울일 수 있다.

[출처] 조나단 에드워즈 [Persons Ought to Do What They Can for Their Salvation], http://goo.gl/DJgJdX에서 재인용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간증

“Personal Narrative”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Jonathan Edwards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혼(soul)과 그 활동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두 번의 각성의 시기보다도 더 크게 변화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 첫 번째는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교인들과 함께 각성하는 경험이었다. 나는 이때 매우 감격하여, 여러 달 동안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그래서 구원에 요구되는 일에 충실했다. 하루에도 다섯 번 골방기도를 드렸고, 친구들과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기도로 보냈다. 그때 나는 신앙에 어떤 기쁨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신앙에 경도되어 의로운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분히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의 한적한 곳에 오두막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기도처로 삼았다. 나는 그 옆의 숲 속에 나만의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나는 때때로 큰 감동을 느꼈다. 나의 정서는 매우 고무되었으며, 쉽게 감동받았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내게 큰 기쁘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과 만족감을 진정한 신앙적인 기쁨이며, 은혜라고 착각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사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자 전에 느꼈던 죄의 뉘우침이 사라졌고, 그로 인한 정서와 기쁨을 잃어버렸으며, 지속적으로 해오던 골방기도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후반기에 들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뉘우침을 기쁘게 여기셨는지, 하나님은 나에게 늑막염을 주셔서, 나는 매일 밤 지옥에 있는 무덤 구렁텅이까지 갔다왔다. 그러나 얼마 후 회복되고 난 다음 다시 예전의 죄악의 생활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이상 고통을 허락하시지도 않으시고, 한동안 침묵하셨다. 나는 많은 사악한 습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괴로웠으며,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맹세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다시 똑같은 문제에 봉착 하곤했다.

얼마 후 나는 전처럼 사악하게 사는 생활과 외면적인 죄(outward sin)를 다 버렸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간구 하면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첫 번째 각성 때처럼 기쁨이나 즐거움은 경험하지는 못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내적인(inward) 생활이었는데, 그것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갈등이 점점 증폭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구원의 길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여서 때때로 구원받는 것에 관해 의문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됐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찾았다. 나의 관심은 내적인 생각과 투쟁으로 가득 찼으나, 그것이 꼭 공포스러운(fear) 것으로만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버린 사람에게는 영원한 지옥을 준비한다는 선택론의 교리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자라게 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끔찍한 교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각성의 시기에는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인간들의 길이 정해졌다는 것이 아주 확신이 들 정도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무슨 수단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특별한 감화를 주셨을 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선택론에 관한 신앙의 장애물과 흠집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내 마음에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그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는 교리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믿게 되어 신앙의 걸림돌이 이렇게 제거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가,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내 마음에 때때로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확신을 주었다. 첫 뉘우침과는 달리 나는 종종 전에 알았던 것과는 또 다른 주님의 주권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주 ‘죄의 회개’만이 아니라 ‘기쁨의 확신’도 경험했다. 그 교리는 매우 기쁘고 즐겁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로서 나는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게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뉘우침 때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내적인 종류의 신성하고 달콤한 기쁨을 맛보았다고 기억하는 경험은 디모데전서 1장 17절 말씀을 읽었을 때였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이다. 아멘’ 그 말씀을 읽었을 때 내 영혼 안으로 신성한 은혜의 감격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다른 감격이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그처럼 다가온 적은 없었던 같다. 마치 내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동행하는 것같이 근사하고 행복한 느낌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님께 기도하러 갔는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시간이 무척 새로운 즐거운 종류의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영적으로 온전히 구원이 임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속죄의 사역과 그에 의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항상 내적인 달콤함이 마음 속으로 스며 들어와서 내 마음은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관한 찬양으로 이끌려 갔다. 이제 나의 이성은 온통 완전히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주님에 대한 묵상과 말씀을 읽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그의 인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함, 그분에게 있는 자유를 주시는 사랑스러운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고상한 주제에 대해서 그렇게 기쁨을 주는 책은 읽어 본 적이 없다. 아가서 2장 1절 말씀에서 ‘나는 샤론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라’는 구절이 무척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대명사처럼 달콤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가서가 나에게 무척 기쁨으로 다가왔는데, 그 당시 이 말씀을 읽으면 내적인 달콤함으로 인해 찬양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굳이 침묵하지 않고 표현해야 한다면, 비록 어떻게 표현하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느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달콤함만을 추출해 낸 것 같았다. 때때로 어떤 영상과 고정된 생각 또는 상상에 사로잡혔는데, 마치 내가 산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고, 세속에서 떨어져 고요한 광야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감싸고 있고, 예수님께서 나와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신성한 감격이 갑작스럽게 불붙어, 말하자면 달콤함 불이 내 마음에 비추었다. 영혼의 격정이랄까,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길은 없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것을 경험한지 오래지 않아, 내 마음에 일어났던 것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고, 혼자서 아버지의 조용한 목초지로 찬양을 하기 위해 걸어갔다. 걷는 동안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너무나 달콤하여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그 광경은 두 가지의 달콤한 것으로 연합된 것처럼 보였다. 장엄하면서 온유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 거룩하고, 아주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매우 높고 웅장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웠다.

이런 신성한 감격에 사로잡히면서 점점 더 나는 활동적이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을 맛보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다 변했다. 말하자면 평온하면서 유쾌하거나 신성한 영광의 모습으로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 지혜, 순결, 사랑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였다. 해와 달, 별들, 그리고 구름, 파란 하늘, 푸른 목초지, 꽃, 나무, 물, 그런 모든 자연 풍경,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 가득차왔다. 나는 종종 앉아서 한참동안 달을 쳐다보곤 했다. 낮에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다. 그때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에 대한 찬양이 조용히 찬양드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전에는 내게 무척 무섭게 보였던 천둥과 번개가 그때는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전에 나는 천둥치며 폭풍우가 불때는 몹시 두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말하자면,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의 모습이 하나님의 임재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구름을 예의 주시했다. 번개가 치는 것을 볼때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종 너무나 나를 기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묵상 속에서 찬양이 절로 나왔고, 또는 내 생각은 혼잣말하듯이 찬양으로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런 상태를 만족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소망을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더욱 맹렬히 주님을 찾았으며, 더욱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 마음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편 119편 28절의 말씀이 종종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이다.’ 나는 자주 더 빨리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은혜 안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 것 때문에,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매우 신성한 것에 고정되어 있어서 찬양으로 절로 솟아났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신성에 관한 것들을 묵상하면서 보냈다. 자주 숲을 걸으며, 조용한 곳에서 묵상을 하거나, 혼잣말을 하듯이 주님과 대화하며 기도했다. 당시에 나는 그런식으로 주님께 찬양을 돌려 드렸으며 기도할 때마다 거의 절규하듯이 어디서나 기도했다. 기도는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기도할 때면 마치 마음 속에 뜨거운 불을 내뿜는 듯 했다. 그때 신앙에서 느꼈던 기쁨들은 내가 소년이었을 때 경험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마치 소경으로 태어난 아이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을 본 것처럼 은혜가 충만했다. 그 기쁨은 매우 내적이고, 순결했고, 영혼을 움직였고, 시원한 것이었다. 전에는 마음에 그런 기쁨이 와 닿지 않았고, 하나님의 신성이 보이지도 않았다. 영혼과 인생을 만족시키지 않았으며, 그 속에는 선하고 도덕적인 것이 나타나지도 않았었다.

그런 신성에 대한 느낌은 뉴욕에서 설교할 때까지 증가되었다. 그때는 회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였다. 나는 전보다 더욱 신적인 것에 민감해졌다.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열망은 더욱 증가했다. 순결, 겸손, 거룩, 천국의 신앙이 더욱 나를 온화하게 했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진실한 크리스챤이 되려는 마음으로 불타 올랐다.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했으며, 모든 것에서 순결과 기쁨 그리고 복음의 축복된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신성에 매우 목말랐으며 거룩하게 사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 그렇게 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렇게해서 나는 계속적으로 밤낮으로 투쟁했으며 어떻게 해야 내가 더욱 거룩해지는지, 더욱 더 거룩하게 살 수 있는지, 더욱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때 나는 전보다 더욱 거룩하고 진실하고, 은혜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나는 전에 내 인생에서 추구해 온 것보다 더욱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살폈고, 좀더 좋은 길과 수단을 연구하고 찾았으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지, 더욱 부지런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힘에 의지하고 있어, 후에 그런 태도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은 나를 가르치지 않고, 매사에 극도의 무기력에 휩싸이게 했다. 내 마음 바닥에는 깊고 비밀스러운 부패와 기만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경건해지기를 추구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가 바랬던 천국은 거룩한 천국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신성한 사랑을 영원히 누리면서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꿈꾸었다. 내 마음은 하늘에 대한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찼으며 완전한 거룩과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했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표현할 수 있는 커다란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고 생각되었다. 그 심정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큰 짐이자 장애였다. 영혼의 내적인 열심이 방해를 받아, 막힌 것 같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천국은 사랑의 세계로서 지복으로 나타났고, 모든 행복이 신성하고 고귀한 사랑, 겸손과, 순전함이 살아서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나는 거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자주 혼잣말을 했다. “복음이 말한 것처럼 나는 거룩을 확실히 사랑해.” 황홀한 기쁨과, 지극한 아름다움과 온화함…신성한 아름다운 것 외에 천국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곳은 이 땅의 모든 진흙탕과 더러운 것과 심히 비교가 되었다.
찬양하면서 얼마간 기록했던 것처럼 내게 거룩은 달콤하고, 평화롭고, 매혹적이며, 진지하고, 고요함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하고, 빛나며, 평화롭고, 활기찬 것이었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뜰이나 정원 같았고, 모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찬 곳 같았다. 모든 기쁨, 즐거움, 평화로움이 있는 곳. 달콤한 고요를 즐길 수 있고, 부드럽고 생생한 햇빛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이었다.

나는 묵상 노트에 쓰길
“진실한 크리스챤의 영혼은 봄에 피는 조그만 하이얀 꽃과 같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땅에서 태양의 은혜롭고,
따뜻한 빛을 받아 꽃망울을 터뜨린다.
평온한 황홀감을 즐기면서, 달콤한 향기를 주위에 퍼뜨리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다른 꽃들 주위에서 있으며, 다른 모든 꽃들에게 햇빛을 받아 마시게 하여 그 꽃의 꽃망울을 터뜨리게 한다.”

나는 겸손하고, 가난한 영혼을 마음을 찢을 만큼 사랑해서 거룩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 마음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을 갈구했다. 내 마음은 이것을 너무나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먼지처럼 낮아졌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단지 어린아이와 같았다.

뉴욕에 있었을 때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는가를 생각하면서 과거의 삶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얼마나 내가 악했는지 생각하니 한동안 쉬지 않고 눈물이 솓구쳐 나왔다.

1723년 1월 12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나의 것을 조금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면에든지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나의 전 재산과 나의 복을 모두 맡길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나의 행복은 조금도 구하지 않을 것이고, 말하자면 조금도 내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세상에 대항해서 육체와 마귀와 싸울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나의 의무에 관해 얼마나 많이 실패해 왔는지를 생각하니 겸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내가 머물고 있은 집에는 존 스미스씨와 그의 경건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분들과 함께 달콤한 신앙이야기를 충만히 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진실한 경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경건하고 주님의 축복된 제자인 그분들 외에 당시 나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교제할 수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가 이루지기를 간구했다. 또한 나의 대부분의 골방 기도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약에 아주 약간이라도 이 세상의 어떤 곳에서나 주님 나라가 이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관해 호의를 갖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유익에 관해서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일할 수 있다면, 나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울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신문을 펴고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그런 소식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읽었다.

나는 자주 도시에서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언덕의 고요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과 비밀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의 신성(divine)을 느끼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스미스씨와 나는 함께 그곳을 산책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대부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에 관해 토론을 했고, 훗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완성하시는 은혜로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어떤 책보다 나는 성경책에서 가장 큰 만족을 느꼈다. 때때로 성경책을 읽을 때면 모든 말씀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달콤함과 주님의 능력이 내 마음속에서 다가와 조화롭게 자리잡는 것을 느꼈다. 종종 나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어쩔 줄 몰랐을 때처럼 모든 말씀구절이 마치 빛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말씀을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감격을 하곤 했다. 종종 말씀 한 구절을 계속하며 묵상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기이한것인가를 깨닫고 기뻐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말씀이 기이함으로 꽉 차있었다. 1723년 4월 달에 스미스씨 가족과 나는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뉴욕을 떠나야 했다.

즐겁고 달콤한 나날을 함께 보낸 그들과 추억의 도시 뉴욕을 떠날 때 나의 마음은 매우 가라앉았다. 나는 뉴욕을 떠나 웨더스필드를 향해서 배편으로 출발했다. 떠나 가는 동안 계속해서 그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슬픈 이별을 한 그날 밤 잠시 정박한 웨스트체스터에서 나는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천국에서는 귀한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나에게 평안을 주었다. 토요일에는 세이브루크에서 정박하고, 안식일을 지켰다. 거기서 나는 홀로 뜰을 걸으면서 안식과 쉼을 얻었다.

윈저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후, 내 마음은 아직도 뉴욕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때로 뉴욕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나 마음이 가라 앉았다. 하지만 나는 1723년 5월 1일의 일기에 쓴 것처럼 하늘에 관한 찬양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기쁨이 충만한 그곳을 생각할 때 큰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거기에는 전적으로 고요와 지극한 사랑과, 해로움이 없었다고 생각이 되어 기쁨을 멈출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계속해서 지극한 사랑의 표출이 멈추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없으며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져 있었다.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이 기쁨과 달콤한 사랑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뉴욕에서 뉴헤이븐에 대학교 강사로 갈 때까지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특별히 볼튼에서 보스톤으로 여행할 때, 뜰을 혼자 걷는동안 천국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뉴헤이븐으로 온 후에 나는 복잡한 생각과 여러 일들로 인해 내 마음은 거룩과 순결에 떠나 신앙이 침체되고 말았다.

1725년, 9월에 뉴헤이븐에서 병에 걸려 윈저(Windsor)에 있는 집으로 요양 가는 동안, 나는 병이 의외로 심해져서 노스 빌리지에 3개월을 머물러야 했다. 그렇게 앓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임재해 주셔서 나를 위로해주셔서 성령님의 달콤함 감화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밤새 나를 간호해준 사람들이 빨리 ‘아침’이 되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 마음에 시편 기자의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은 주를 기다리네.”라는 노래를 생각나게 하여,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파숫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라는 구절이 그랬다. 아침의 햇빛이 창문으로 비쳐올 때 그것은 내영혼을 하루종일 즐겁게 해주었다. 아침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몇몇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원했는데, 만약 진실로 거룩하다면 그들을 존경하고 기쁨으로 그들의 발 아래에서 종의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몇몇 일상적인 일들로 인해 다시 나의 마음은 분산되었고, 너무 과도하게 이것저것 신경쓰다보니, 영혼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전보다 더 내 마음이 분주해져, 일들에 지치게 되었다. 노스햄튼에 돌아온 후 나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신 은혜의 모습을 느끼고 달콤한 찬양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 자체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은 항상 가장 큰 사랑 그 자체로 다가오셨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약속, 그것에 인간은 절대 의존해야한다는 교리가 나에게 매우 달콤하고 은혜롭게 다가왔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분의 커다란 은혜로 느껴졌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권자이신 그분께 경배하고 자비를 간구하며 큰 즐거움을 만끽했다. 즉 그 모든 말씀들이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푸른 초장처럼 다가온 복음의 교리들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가장 큰 선물로 내가 가장 갖고 싶고, 바라던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이 가장 보편적이고 은혜롭고, 훌륭하며, 아름답고, 찬란한 길로 보였다. 만약 다른 길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천국을 완전히 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이사야 32장 2절 말씀인 “그 왕은 바람과 폭풍으로부터 피할 피난처이시요”라는 구절이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종종 나에게 큰 즐거움을 제공했다. 그분이 내 머리요, 몸의 일 부분이요, 선생님과 예언자가 되신다는 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어린아이의 영혼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세상의 광야를 통과해 나아간다는 생각이 나를 즐겁게 했다. 마태복음 18장 3절 말씀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가난하고, 완전히 비인 마음을 가진 영혼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그리스도를 겸손히 홀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내 자신을 완전히 뿌리채 뽑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오는 모두 사람에게 예수님의 믿음 안에 살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겸손하고 거짓이 없이 대하신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믿음을 확고히 하게 하곤 했다.

시편 95편 1절의 말씀이 내게 달콤하게 다가왔다. “오 주여, 우리 중에 어느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이름만 은혜와 자비와 진리를 주시나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21절에서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그의 시간에 그리스도께서 영을 즐거워 하시고” 라는 말씀을 읽고 새 힘을 얻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또한 나를 즐겁게 하고, 그 즐거움으로 인해 나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그 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때때로 내 마음을 타 오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특징적인 이름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삼위일체에 관해서 은혜롭게 알려 주셨다.하나님께서 세분 즉, 성부, 성자, 성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즐겁고, 좋았던 것은 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운 것을 직접 보았을 때였다. 이 기쁨은 내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더큰 기쁨과 감사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내 유익을 위하여 내것에만 눈을 고정시키고, 은혜와 기쁨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것을 것을 참을 수 없는 상실처럼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은 이 세상에서의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경도되었다.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던 과거의 역사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의 역사를 읽었을 때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내가 읽을 역사에서 그 약속의 성취가 다시 나타날 것을 생각하니 무척 기쁘고 즐거웠다. 내 마음은 성경에서 예언 되어있듯이, 미래에 이 땅에 주님의 은혜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생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때때로 나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겸손하심이 구원자로서 가장 알맞은 성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의 수 만명의 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느껴졌다. 그 피와 속제와 의로움이 달콤했고, 그것이 항상 나의 영혼을 불타게 했다. 주님의 아파심에 대한 생각에 나는 말할 수 없는 내적인 투쟁과 거친 호흡과 신음으로 허덕였고 그 아픔이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채우게 했다.

한번은 1737년에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가 보통 하던대로 말에서 내려 고요한 장소에 들어가 찬양과 기도를 드렸다. 그때 나는 겸손하시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순전하고 달콤하며 은혜가 풍성하신 인간과 하나님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하게 체험했다. 조용하고 달콤하게 다가온 이 은혜는 거대한 천국으로 나타났다. 모든 생각과 개념을 집어 삼킬만한 거대한 탁월하심으로 다가와 할말을 잃게 했다. 그것은 판단하건대 한 시간 이상 계속 되었고,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으나, 당시 나는 텅빈 것 같고, 아무 것도 아닌, 단지 먼지처럼 느껴졌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그를 신뢰하고, 그와 함께 거하며, 그를 따르고 섬기며, 완전히 성화되고, 신성과 천국의 순결함으로 깨끗하게 되었다. 그후 여러번 나는 그런 상태를 경험했고, 그것과 똑같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당시 나는 삼위의 3번째 위이신 성령님의 영광을 여러번 느끼며 그분께서 내 영혼에 직접 주입하시는 신성한 생명과 빛의 교통함을 체험했다. 성령님과의 교통하심으로인해 하나님께서는 달콤함과 신성한 은혜의 끝없는 샘의 근원이 되셔서 나타났다. 그분은 내 영혼을 충만히 채우셔서 나에게 큰 만족을 주셨고, 달콤한 교제를 계속해서 허락하셨다. 또한 은혜의 해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을 생명과 빛으로 흩뿌리셨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말씀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생명과 달콤함과 아름다운 은혜의 말씀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말씀은 더욱더 다른 말씀을 갈급하게 하여, 내 마음을 풍성히 채웠다.

그런데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내 자신의 죄와 비열함을 느끼고, 자주 심각하게 울음을 터뜨리며 한동안 계속해서 슬픔에 빠져 자주 자신감을 잃고 낙망했었던 적이 있다. 회심하기 전보다 더, 나의 악함과 해로움에 대한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때때로 나는 막약 하나님께서 나를 악인으로 삼으시면, 나는 모든 인간보다 가장 악하게 되어,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악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에 관하여 나와 대화할 때, 자신들의 사악함을 고백하며 자신이 악마만큼 악하다고 말하곤 고백하곤 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나의 사악함에 비하면 희미하고 미미하게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사악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그 생각과 상상이 나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끝없이 큰 산더미같은 홍수가 내 머리 속에 채워졌다. 끊임없이 죄가 생각나며 그것이 나의 죄성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수년 동안 그런 생각이 “무한위에 무한, 무한위에 무한…”이라는 말로 입안에 계속 맴돌았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사악함을 보았을 때 나는 지옥보다 더 깊고 끝없는 심연 같은 것을 느꼈다. 만약에 주님을 찬양하고 영원하신 은혜를 찬미하고 그의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은 지옥 밑으로 가라 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주님의 주권의 은혜가 내 마음을 깊이 찔렀다.

그러자 내 죄에 대한 판결이 너무 가볍고, 희미해 보였다. 내 죄가 다 사라졌다는 생각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 나는 죄성이 나를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죄를 위해 울부짖음을 멈추었을 때, 나의 회개가 죄를 없애는데 어떤 공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로지 주님의 주권적 은혜로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았다-용환)

주 앞에 엎드려, 낮아짐으로 주님께 간구했을 때 너무 늦게 마음을 부수었다는 생각으로 인해 나는 다른 모든 크리스챤보다 더 낮아짐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낮아지고 겸손히 나아간다고 생각했을 지는 몰라도. 그들은 나보다 형편이 나아보였다. 그래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내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사람이 “먼지처럼 겸손해져”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낮아졌지만, 나는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되었음으로 기도 중에 “주 앞에 무한히 낮아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었다. 젊었을 때, 사악함의 깊이와, 자만감, 위선, 속임수가 내 마음 밑바닥에 있었던 것과, 그것에 얼마나 무지했던가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이후 내 자신이 의롭게 되기 위함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 바라게 되었다. 그런 삶이 나의 보편적인 일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스스로 의롭게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즐겼던 사실이 진절머리 나게 하고 혐오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전보다 더욱 양심이 예민해져, 나의 자만심과 이기적인 영혼에 대해 고통을 받았다. 나는 사단이 어디에서나 그의 머리를 들어 내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회심 한 후 2, 3년 동안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더 나은 크리스쳔의 모습이었지만 ‘지속적인(constant)’ 기쁨과 연락함을 느끼게 된 것은 최근에 들어서였다. 나는 주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기쁨으로 그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복음에서 밝혀진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토요일 밤에, 나는 다른 교리보다 더 복음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나는 “이것이 나의 선택된 빛이구나, 나의 선택된 빛이구나”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만이 나의 예언자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께 배우며, 조명받으며,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같이 동행하는 삶이 다른 무엇보다더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1739년 1월의 어느 토요일에 나는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되고 달콤한 길 인지를 알았고, 의의 길을 행하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에 일치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때로 나는 그 때문에 문들 닫고, 나를 자제시켜야 했다. “주님 앞에서 옳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 축복받은 자이고, 행복한 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그의 기뻐하심에 따라 질서를 부여 하신 것이 얼마나 합당하신 것인가를 알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그의 뜻대로 세상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