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9 그 예배를 멈추라: 코로나19과 예배

0. 하나님은 무조건 예배 드리는 걸 좋아하실까?

이사야 01:13-17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 그 예배를 멈추라라

2. 멈추라고 하신 이유는?

3. 내가 교회다

20181016 [교리] 예수님의 죽으심

본문

사 53:4~6 / 2018년 10월 14일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한줄 요약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죄를 범한 인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은 대속이었습니다.

개요

프로야구 정기 시즌이 끝났습니다. 플레이오프라고 해서 정규시즌이 끝난 뒤에 1등을 가리는 시합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스포치를 좋아하는 분들, ‘팬’이라고 하는 분들은 스포츠에 매우 몰입을 합니다. 대학 동창 중에 한 명은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했습니다. 그 친구는 타자들의 타율과 투수들의 방어율 같은 기록을 암기하고 다녔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그런 팬의 모습이 놀랍게 보이겠지만 더 심하게 몰입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야구팬 중에는 선수나 감독보다 데이터를 잘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수 중에는 자기 기록은 몰라도 다른 사람의 기록은 잘 모르는 선수도 있습니다. 데이터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 아무리 잘 알고, 각종 기록을 암기하고 있어도 팬은 팬이고 선수는 선수입니다. 결국 기록을 만들고 감동적인 순간을 가져도 주는 사람은 팬이 아니라 선수입니다. 여러분은 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팬이 되고 싶으십니까? 교회에도 선수가 있고, 팬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선수가 될 수도 있고, 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용어로는 선수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팬은 무리라고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데서 그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녀면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경험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0. 복음의 신비

복음의 신비는 사랑과 공의를 둘 다 만족시켰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지 않고 용서하면 불공정한 일이 되고, 죄를 지었다고 벌만 주면 사랑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모순,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점이 신비입니다.

동그라미와 네모를 합칠 수 있을까요? 그냥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원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위에서 보면 원이고, 옆에서 보면 네모입니다. 생각이 넓어져야 신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도 이처럼 생각이 넓어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질고는 병 혹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죽어간다는 증거가 질고입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정신적 , 육체적으로 질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과 사회를 바라볼 때 이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질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질고는 형벌을 동반합니다. 질고의 원인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는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인간이 의롭지 못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 생명을 이어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도 질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과 정신에 질고가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부패했습니다. 다른 말로 비정상적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에 질고가 있기 때문에 슬픔이 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모두 질고에 원인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영혼이 아파서입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자녀, 형제자매, 직장 동료, 주변 사람들이 아픔을 줍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2. 그가 찔림은

우리 삶의 질고와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불경건의 대가를 치러야 불경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대속의 삶이셨습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죄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각성이 일어나기는 힘듭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이 시작됩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알려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용, 장영학 –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여러 경험이 축적되고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양한 관점을 접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다. 이것이 자기 통제적 정신이다. 이 단계가 되면 비로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다. 사회적 정신은 모두가 ‘예’ 하면 절대 ‘아니오’ 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적 정신에 이르러야 자신만의 관점을 남들에게 주장할 수 있으며,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남들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단계는 자신의 관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남, 특히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게 된다. 자신만이 옳은 사람이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임원들 중에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에 빠져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분들은 자기 통제적 정신을 가지고 성공했지만 그 성공 경험 때문에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인용 끝]

자기 객관화에 이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는데, 이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장 처음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당연히 오는 단계입니다.

성경을 기가막히게 푼다는 사람 중에 죄의 각성이 있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무리일 뿐입니다. 아직 선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3. 그에게 담당시켜셨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대신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필요하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야구 룰과 선수들의 데이터를 많이 안다고 해서 선수가 아닙니다.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뛰어야 선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직접 살아야 선수입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죄의 각성이 일어나는 데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죽음의 신비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의 각성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우리의 어두운 눈이

2018.06.10_[교리]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

# 본문

이사야 6:1~7 / 2018년 06월 10일 주일 설교

# 핵심 구절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설교 듣기

# 한줄 요약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가장 본질적은 것은 영이라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품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0.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점과 다른 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논리로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론적 논증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주론적 논증은 자연을 근거로한 논증으로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목적론적 논증은 질서와 설계로부터 이끌어 낸 논증으로써 만물은 반드시 무엇엔가로 귀결된다는 논증입니다. 도덕론적 논증은 인간에게 있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도덕적 존재인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논증입니다.

우리가 학교 교육을 통해서 진화론만을 배워서 진화론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도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고등 생물로 진화하지 않고 단순 생물로 존재하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합니다. 바퀴벌레같은 생물이 생존력이 좋은데 인간으로 진화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어떻게 무생물이 식물같은 생물이 되고, 식물같은 생물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무생물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특성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점과 다른 점

하나님과 사람의 공통점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인격적인 특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진 특성입니다.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영과 거룩입니다.

1.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보는 일체의 개념을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물질에 속한 특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감각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물질은 아무리 튼튼해도 썩고 낡고 사라지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물질에 비유하면 안됩니다. 십계명 첫 두 계명과 다른 곳에서 형상들과 초상들을 금한 이유도 하나님이 영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점

풍수지리설, 관상 등이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것입니다. 묘자리를 잘 쓰며 악한 사람이라도 복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대응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가장 놀라운 증거는 그분의 편재하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땅 속에도 우주 공간에도 존재하십니다.
악한 영은 우두머리인 사탄마처도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고, 어디에나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모든 곳에 계십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이 다른 가장 근본적인 성품은 거룩입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증오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 25:16) 무릇 이같이 하는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정의와 거룩을 기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잠 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이라든가, 죄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에게서 죄인을 떠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을 벌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노는 강렬하시다

3. 거룩해 지는 방법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면 자기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폭로되어 하나님께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게 됩니다. 더 가까이 가게 되면 소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정결해져야 합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00.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격을 가진 분이고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한 스랍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얼굴과 발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면 동시에 자신의 죄악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정결하게 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4.01_[부활절]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본문

이사야 25:08 / 2018년 04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한줄 요약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영국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글입니다.

개요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부활절을 맞이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난주간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덕분인지 부활절이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오늘은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0. 죽음의 죽음 – 부활죽음의 죽음이라는 말은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이 쓴 책 이름입이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죽기 전에는 어쨌든 희망이 있는데, 죽음은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맙니다. 그 무자비한 죽음이 죽는다는 말이 주는 기쁨과 통쾌함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죽음이란 삶이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살아 있는 졸병이 죽은 황제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겠지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삶이 연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범위는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인데 불신자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담담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종착점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죽음의 불안을 해소해 줍니다.

저는 기독교 사상이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활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모두 인간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데 있습니다. 이 기독교 사상을 생각할 때마다 매료되고 매혹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고 인간 세상에 비극이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 모든 설명의 결과로서 부활을 제시합니다.

부활은 삶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비로소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비로소 삶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가장 큰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을 가지고 살아가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1. 사망을 멸하시며

먼저 성경은 부활이 사망을 멸한다고 합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땅에서 뽑힌 것이 사망입니다. 나무는 땅에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시들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나무가 완전히 죽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땅에서 뽑혔을 때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는 백 년 정도 살다가 죽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습니다.

요즘 가끔 돌연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도 생명이 떠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이 자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최초의 시동을 걸어주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아직 그 최초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지만 생명이 떠난 상태를 고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원인은 영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생명의 공급이 단절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육체로는 백 년 정도 더 살지만 죽음이 예정된 삶일 뿐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멸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 육체 말고 새로운 육체로 변모합니다. 그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줍니다. 생명을 다시 공급해 줍니다.

2. 눈물을 씻기시며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사망은 불경건과 불의로 이어집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눈물은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을 돌아볼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 잘못된 일을 예수님이 돌이켜 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슬픔이 모두 씻어집니다.

3. 수치를 제하시며

불의는 수치를 가져옵니다. 유교는 수치, 즉 부끄러움을 들추어서 사람을 조종합니다. 우리 민족 마음에 수치가 있어서 왜곡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부끄러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수치를 이해하시고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결과로 수치를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가 모두 제거됩니다.

결론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죽음을 완전히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사망, 눈물, 수치도 극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어야 삶은 삶으로서 빛날 수 있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018.01.21_[신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이사야 66:01~24
2018년 01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66:1~24

[핵심 구절]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한줄 요약]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면 불필요한 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개요]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새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나누어주는 다이어리를 쓰는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이어리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와는 차별성을 가지며서 비싼 값에 팔리는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이제 유명해졌고 이랜드 출신이 설립한 3P플래너도 있고, 윈키아 플래너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가격이 비싸고 디자인이 좋은 것을 플러너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을 통해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0.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은 목표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리는 단순히 계획, 일정을 쓰는 것이지만, 플래너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과 일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플래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먼저 적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상이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은 플래너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도 강조된 말입니다.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었습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기 원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즉,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성공이나 성취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가족과 관계가 안 좋은 경우, 치열한 경쟁으로 높는 지위에 올랐지만 인격을 상실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지막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닥치는대로 살다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게되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후회하게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최후의 순간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 1~6. 하나님의 초점 : 행위가 아닌 마음

이사야서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은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예배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멋진 성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이보다 특별한 건축물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건축물을 건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신앙도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성전은 무너집니다. 성전의 그릇들도 모두 약탈당하고 맙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래도 이게 중요하지 않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진정한 깨달음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을 살인하는 것처럼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을 가지고 성공을 가르치고 예배를 통해서 번영주의를 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 7~14. 하나님의 방법 : 고난 중 형통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산을 하지만 진통하는 즉시 해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낳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빨리 해산한다고 해도 진통이 전혀 없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하느니라.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쌀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은 고생일 뿐이지만 의미있는 고난은 영광이 됩니다.

3. 15~24. 하나님의 성품 : 자비와 심판

하나님은 자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일년의 계획을 세울 때, 신앙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빠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위해서 바쁜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을 생각하면서 일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일년 계획을 세울 때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자.

2018.01.14_[신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는 기회

이사야 55:01~13
2018년 01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55:1~13

[핵심 구절]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줄 요약]

인생에서 기회는 지속적으로 오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요]

새해부터 가상화폐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누가 얼마 벌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등등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고 초조해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 기회는 계속 옵니다

지금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이라고 해서 인터넷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급속한 상승 한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관련 기업 주식이 폭등해서 한 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 전으로 돌아가보면 강남 개발을 시작하던 70~80년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회는 주기적으로 계속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복기를 했다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1~5. 기회는 내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만나라고 하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불신이 깊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미리 예언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 준비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시간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큰 발전을 이룬 강의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모든 강의가 다 도움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식이 쌓이니까 도움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와 인생의 교차점이 많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2. 6~9. 하나님이 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수는 고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으면 하수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서출판 열림원, 1998)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10~13. 하나님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도 또 옵니다. 크고 작은 기회들이 계속 올 것입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잘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흘려보내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의 성품에도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복음을 가르치신 이유도 비슷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어떤 옷을 입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기회가 옷을 갈아입고 오더라고 알아보는 시각을 갖추자

2018.01.07_[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

이사야 40:01~11
2018년 01월 0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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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과거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십니다

[개요]

신년입니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느라 바쁠 때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셔야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0.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인생살이는 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비슷하게 새해가 왔지만, 새해같지 않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는 달력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도 새해를 가져도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새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인생의 새해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새해를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생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이 어떠게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3. 노역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 읽은 이사야 40장 2절을 보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고를 하셨읍니다. 여기서 ‘노역의 때’는 70년 포로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해는 무작정 오지 않습니다. ‘노역의 때’를 채워야 옵니다. 그 기간을 바르게 보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 범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들은 경험이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그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범죄를 행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성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공부하고 청교도와 조직신학을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이게 성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길에 들어 서기는 했지만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지은 존 뉴톤이 노예 상인이었잖습니까?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범죄 조직에서 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은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나라 범죄자들과 다르게 일생동안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존 뉴톤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글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깊이 회개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존 뉴톤의 편지]

선생님, 그 당시의 나를 보실 수만 있다면…죽음의 밤 속에서 나는 고독 가운데 우수에 담겨 암석 위에 나의 셔츠 하나를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은 땅 위에 그것을 놓아서 잠자는 동안에 내 등을 말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불쌍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배에 딸린 보트 하나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만 숲속으로 도망쳐 버려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의 행동,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외적 행위들보다 더욱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다면; –사도가 언급하였던(딛3:3)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라고 말하기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과 감당할 수 없는 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상상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There was at that time but one earnest desire in my heart which was not contrary and shocking both to religion and reason: that one desire, though my vile licentious life rendered my peculiarly unworthy of success, and though a thousand difficulties seemed to render it impossible, the Lord was pleased to gratify.

그 때에 신앙과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부딪히지 않는 진지한 열망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열망을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도 합당치 못한 사악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오고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But this favor, though great, and greatly prized, was a small thing, compared to the blessings of his grace; he spared me, to give me “the knowledge of himself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하지만, 이 호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분의 앞으로 보여주실 자비로우심과 비교하게 되면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In love to my soul, he delivered me from the pit of corruption, and cast all my aggravated sins behind his back. He brought my feet into the paths of peace.

나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사 나의 모든 엄청난 죄악들을 당신의 뒤쪽으로 내 던져 버리셨습니다.그리고는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This is indeed the chief article, but it is not the whole.

이것이 물론 주요한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은 아닙니다.

When he made me acceptable to himself in the Beloved, he gave me favor in the sight of others.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나를 용납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호감을 받게 하셨습니다.

He raised me new friends, protected and guided me through a long series of dangers, and crowned every day with repeated mercies.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여러 가지 위험들 가운데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자비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출처]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by John Newton, 존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위와 같은 말을 하면, 이렇게 반발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이제는 고난이 끝날 때가 되이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난이 끝나고 잘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복이 함께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앙도 좋아지고 복도 받은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세례 요한처럼 고행만 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2. 4~8. 그리스도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선행은총이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개혁신학의 선행 은총이 인본주의(알미니안)적인 선행 은총과 다른 점은 하나님 주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권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선행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나간 부분이 어디냐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방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요한의 세례’ 다음에 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하고 동일시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이 감격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선행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각성이 강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노역의 때’가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게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만이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 ‘예언’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3. 9~11. 그리스도의 시대가 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으로 오십니다. 참았던 화를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능력, 그리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영광으로 가득찬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실 때 이 땅의 작은 권력, 영광에 취했던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에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림 예수님의 겸손을 알고 그분을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시면서 노역의 때를 지나시기 바랍니다.

[결론]

노역의 때를 채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016.12.04_[대강절] 확고한 소망

2016년 12월 04일 주일 설교
이사야 40:1-11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10)

[한줄 요약]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확고한 소망을 들려주었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북이스라엘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비극을 미리 예언함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을 가리킨 구절
2.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요구하심
예수님은 대신 대가를 치르신 분
3. 확고한 소망
절망 속에서 필요한 건 소망
예수님의 성품이 소망을 주심

[결론] 예수님은 절망 속의 소망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