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기도_12w4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아기가 되시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저희는 동방의 박사들은 아니지만, 저마다 마음 속의 별을 따라 이곳에 온 순례자들입니다. 이 천년 전 베들레햄 소박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오늘 저희들 마음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오심으로, 짙은 어둠에 잠겼던 밤은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절망, 슬픔, 아픔이 깊을수록 주님이 오심으로, 그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영원히 변화될 것을 소망합니다. 저희들의 소망을 주님의 은총으로 응답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지난 주간에도 아까운 생명들이 덧없이 스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기를 잃은 부모들과 화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가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이없이 잃지 않도록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게 하여주시옵소서.

능력의 하나님,
전쟁의 기운이 여전히 우리 나라 주변에 감돌고 있습니다. 저희는 북쪽 악한 세력과의 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타협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최초의 선택이 되기보다는 최후의 선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속히 국제 사회의 감시 감독을 수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이 겨울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지하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굳세게 지켜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며, 그대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라는 순례자들의 오래된 질문을 되뇌이며, 비록 가진 것 없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행복한 부자가 되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영원한 소망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17년 12월 24일 누가복음 02:21~35, [성탄절] 근원 치료를 위해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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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기도_12w3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하나님,
산도 들도 거리의 사람들도 두꺼운 외투를 두르고 무겁게 입을 다문, 고요한 풍경을 지나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 가진 것은 기다림 밖에 없는 가난한 계절에 저희는 오히려 다가오는 성탄을 기대하며 부요한 자들이 됩니다.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에 오시고, 귀족이 아니라 목동의 인사를 받으신 예수님. 그 마음을 생각하라고 이러한 계절에 오셨음을 깨닫습니다. 현대 문명의 안락함을 누리더라도 마음만은 항상 낮은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서 맥아더 장군의 기도에 저희 마음을 실어 기도드립니다.

“오, 주님! 제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정직한 패배 앞에 당당하고 태연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이끌지 마시고, 자극받아 분발하도록 고난과 도전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진 비 바람을 견뎌내게 하시고, 실패한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높은 이상을 품은 사람, 남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웃을 줄 알면서도 우는 법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들 외에 그에게 유머 감각을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항상 진지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진정한 위대함은 소박하며, 진정한 지혜는 열려 있고, 진정한 힘은 너그럽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 애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 때 저는 감히 그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사랑의 하나님,
저희 안에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와 열방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자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 할 수 있는 전도의 열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들을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성탄의 사랑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두운 세상에 참빛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17일 창세기 03:01~24, [대강절3] 예수님이 나의 새언약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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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기도_12w2

*읽으면 기도가 되니, 소리내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거룩한 기다림의 기간, 대강절에 예배의 자리에 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면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가로수들이 한때 무성했던 잎들을 떨구고 빈 손과 진실한 마음으로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도 그들처럼 모든 장식품을 버리고 빈 손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쌀쌀해져가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짙어지는 것을 봅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교육이 고도화되면 곧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는 한숨처럼 보입니다.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옵기는, 우리 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없는 사회 발전이 없고, 죄의 각성 없는 인간 행복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발전과 성장 만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고등학교 실습생이 중인 현장 실습 중에 사망하고, 낚시배가 침몰하여 여러 명의 가장들이 삶을 마감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하시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이루어져 사람을 어이없이 잃는 일이 없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몸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어르신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분들의 정신을 맑게 하시고 관절을 부드럽게 하시며 모든 혈관과 세포 조직을 깨끗하게 유지해 주시옵소서. 더불어  중장년, 젊은이, 아이들에게도 주님의 건강한 생기를 매일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여 다시 우리 나라의 희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임을 깨달아 적극적으로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눈덮인 겨울 들판처럼 고요하지만 그 밑에 소망의 싹을 간직한 교회들을 지켜주시고 그곳에서 진리를 사모하는 참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준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10일 창세기 02:01~25, [대강절2] 예수님이 나를 변화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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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주_다시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많은 계획과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한해가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나무처럼 어느덧 한 달만 남았습니다. 하오나 그 가지 위에 쌓인 첫눈같은 은총이 저희들 마음에도 내릴 것을 기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금 제 자신을 돌아보고, 너무나 쉽게 내어버린 시간들을 후회합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주님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라는 가르침을 잊고, 불평으로 지내버린 마음들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무엇보다 깊어가는 겨울 날씨 속에 몸, 혹은 마음, 혹은 환경이 추운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주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하여 작은 불씨라도 그들에게 전해지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나라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속히 악한 독재자를 멸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지하 교회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불같이 연단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대강절 기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처럼 교회가 다시금 부흥을 기다리게 하시고, 목회자들과 성도가 거룩한 사명으로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대강절 아침, 예배를 통해서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주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03일 창세기 01:01~31, [대강절 1] 예수님이 나를 존귀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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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넷째 주_첫눈같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
어느새 절정을 이루던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고 단풍 대신 첫눈이 빈 가지 위에 쌓인 것을 봅니다. 이 아침, 저희들의 말라비틀어진 욕심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첫눈같이 거룩한 주님의 은혜가 내릴 것을 확신합니다.

겨울의 길목에서 눈과 낙엽으로 덮인 길을 걸으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변덕스런 사람들의 마음에 낙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 섬김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지진이 일어난 포항 지역의 상황을 온 국민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놀라고 손실을 입은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또한 한 주간 연기된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의 마음도 지켜주시옵소서. 어떤 결과를 얻든지 그들이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좌절, 낙심하지 않도록 소망을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청년 실업, 고용 불안, 부의 양극화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많아지는데 사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저희는 사랑 없는 과학 발전과 경제 성장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먼저 저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재정 비리, 성적 문란, 교회 세습 등으로 손가락질 받는 현실을 회개합니다. 잘못한 목회자가 통회하게 하시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교인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혜롭되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26일 갈라디아서 04:01~31,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셋째 주_빈들을 보며 기도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풍요로웠던 가을 들판이 어느새 빈들이 되었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빈들같은 저희들 마음을 스쳐가지만, 저희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저희는 빈들이 아니라 그 위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건물, 멋진 옷,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스스로 빈들에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주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400년 전 안락한 고국을 버리고 오직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열망으로 신대륙으로 나아간 청교도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결단이 오늘날 미국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복이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추수감사절’을 지킨 그들의 감사를 저희도 갖기 원합니다. 옳은 길을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수능을 준비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진으로 인해 시험 일자가 변경되었지만, 반석이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동요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프거나 지각, 착각, 실수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기대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아주신 예수님,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치료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기가 저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생기를 더욱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시간에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19일 시편 50:01~23, 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둘째 주_성전에서 생수를 보내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하나님,

차가운 기온은 들판의 푸름을 앗아가고 있지만, 산마다 단풍으로 물들어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심을 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오늘 저희를 불러 예배하게 하신 이 시간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깨어나고 성장 성숙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주시옵소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권능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 권능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처럼 내일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안된다고 좌절하지 않도록 종일 소망을 주시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절박한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오늘도 ‘잠자는 나’ 보다는 ‘깨어 있는 나’로 살기를 원하고, ‘미워하는 나’ 보다는 ‘용서하며 사랑하는 나’로 살기를 원합니다. 항상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땅에서 참 사랑을 몸소 보이시고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처럼 주님을 본 받아 온전히 사랑하며 섬기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편지로 읽혀지는 삶을 살게 하시고, 사랑의 삶, 나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배 속에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시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속에 함께하심을 믿시오니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며 주님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죽었던 모든 생물을 살리듯이 저희 안에 흐르는 성령님의 생수가 죽어 있는 저희를 살리고 나아가 저희 이웃 또한 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년 11월 12일 갈라디아서 03:06~29,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다른 설교 듣기]

A~Z 알파벳 신앙

A. (Always)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
B. (Busy)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라.
C. (Check)
항상 하나님 안에 있나 체크하라.
D. (During Love)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라.
E. (Enjoy)
내 영혼에게 날마다 기쁨이 되게 하라.
F. (First)
항상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어라.
G. (Give)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사랑을 드려라.
H. (High)
항상 저 높은 곳을 사모하라.
J. (Joy)
항상 기쁘게, 감격으로 하나님을 만나라.
K. (Kind)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
L. (Leave)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떠나지 말라.
M. (Memory)
은혜 받았던 것을 잊지 말라.
N. (Need)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늘 생각하라.
O. (Only)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라.
P. (Plan)
하나님의 계획이 높으심을 깨달아라.
Q. (Question)
의심을 품고 물어 보지 말라.
R. (Remember)
늘 하나님을 기억하라.
S. (Show)
나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자.
T. (Test)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U. (Use)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자.
V. (Vex)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자.
W. (Will)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맡겨라.
X
“아니오”라는 불순종을 제거하라.
Y. (Yesterday)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마라.
Z. (Zea)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

어느 직장인의 기도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굴 찡그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상사와 선배를 존경하고 아울러 동료와 후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아부와 질시를 교만과 비굴함을 멀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루에 한번쯤은 하늘을 쳐다보고
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고
일주일에 몇 시간은 한 권의 책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한가지 이상의 취미를 갖게 하시어
한 달에 하루쯤은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고
미래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과
큰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지니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용기와
남의 허물을 따뜻이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과
고난을 끈기 있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더욱 길러 주옵소서.
직장인 홍역의 날들을 무사히 넘기게 해주시고
남보다 한발 앞서감이 영원한 앞서감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시고
또한, 한걸음 뒤처짐이 영원한 뒤처짐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반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시고
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매사에 충실하여 무사안일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매일 보람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직장을 그만 두는 날
또한,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전부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짓게 하여 주옵소서.

행복 십계명

일. 일일히 간섭하지 말라

이. 이기심을 버려라

삼. 삼상오오 짝을 맞춰 대화하라

사. 사생결단하지말라

오. 오기를 버려라

육. 육체를 괴롭혀라(운동)

칠. 칠십프로만 만족하라

팔. 팔자 타령하지말라

구. 구질구질하게 살지말라

십. 십자가만 바라보라

 

[출처] www.speech21.co.k

내가 만나야 할 10종류의 사람들

  1. 카카오톡 자료를 잘 보내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
  2. 내일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3.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4. 확신에 찬 말을 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기준 잡힌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5.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주위를 항상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6. 아무리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작은 행복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이다.
  7. 생각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8.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사람을 만나라. 그 사람은 항상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다.
  9. 언제나 밝게 웃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멀리 있는 복도 찾아오게 하는 사람이다.
  10.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삶이 항상 풍요롭다.

 

[출처] http://www.speech21.co.kr

가나다라……………….사랑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움”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 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 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도 빛나는 것은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은 “편안함”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깊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고 싶은 것은 “보고싶은 마음”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입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은 “존중”입니다.

하얀 좋이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입니다.

 

[출처] http://www.speech21.co.kr

A4 용지 한 장으로 외우는 성경 약도

자료실에 오랜만에 자료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저에게 성경을 배운 분들은 A4 용지를 접어서 성경 내용을 암기하는 방법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에게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ppt 자료를 올렸습니다.

자료실에  ‘구속사, 맥을 잡아라!’ 강의안이 있는데, 저는 이 강의안이 없어도 성경과 A4 용지만으로도 동일한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저에게 강의를 들으신 분들도 성경과 A4 용지만 있으면 내용을 대부분 기억해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보다는 ppt 파일을 보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눌러서 게시판에 가셔서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이 약도를 암기하시면 성경 지명의 90% 이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성경을 전혀 모르는 분들에게 가르쳐 보았더니 익숙해지니까 30초 정도에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 암기하시면 성경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아래 ‘자료실’을 누르세요.

자료실

하나에서 열까지

  1.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 :
  2.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 : 우리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 : 사랑해
  4.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 : 내 탓이오
  5. 돈 안드는 최고 동력 다섯 글자 : 정말 잘했어
  6.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 : 우리 함께 해요
  7.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 : 처음 그 마음으로
  8.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9. 다시한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 :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10.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열 글자  :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께!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

금세기의 대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는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다 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부흥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신학이 철저하게 그의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오히려 최근의 부흥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은사주의운동캠프에 속해있으면서 에드워즈의 글들을 자신들의 신학의 들러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조나단 웨드워즈의 글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아래에 그의 회심간증을 옮겨놓는다. 그가 1737년도에 작성한 것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자신의 회심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려놓고 있다. 그의 회심은 15년전 곧 1721년, 그러니까 자신의 20살때쯤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심간증을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던 싯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고백이 머리요, 신조만으로서의 고백이었음을 그의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되어지고 또한 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생생한 언어들로 대할 수가 있다.

그의 표현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신비주의적 경향(하지만 그의 신학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님을 유의하시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을 잘 지켜서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혹은 그의 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주여, 부흥의 영이시여, 에스겔골짜기의 그 마른 뼈들같은 우리들에게도 부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번역한다.

자료출처: http://www.calltoworship.org/calltoworship/testimony/jonathan.html

Jonathan Edwards “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간증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구원받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내력
I had a variety of concerns and exercises about my soul from my childhood; but had two more remarkable seasons of awakening, before I met with that change by which I was brought to those new dispositions, and that new sense of things, that I have since had.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가진 채로 여러 가지 실행들을 해 왔다.그리고 두 번의 현저하게 주목할 만한 각성의 기간을 두 번이나 거친 후에야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되는 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런 기질들과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The first time was when I was a boy, some years before I went to college, at a time of remarkable awakening in my father’s congregation.

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몇 해 전, 부친의 교회에서 있었던 현저한 각성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I was then very much affected for many months, and concerned about the things of religion, and my soul’s salvation; and was abundant in duties.

그 당시 몇 달 동안이나 그 각성으로 인해서 영향을 입어서는 신앙의 문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는 그것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했었다.

I used to pray five times a day in secret, and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us talk with other boys; and used to meet with them to pray together.

하루에 다섯 번씩 은밀히 기도시간을 가졌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대화들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곤 했었다.

I experienced I know not what kind of delight in religion.

나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모르는 채로 신앙 안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My mind was much engaged in it, and had much self-righteous pleasure; and it was my delight to abound in religious duties.

내 마음은 그것에 깊이 몰두했었다. 또한 무척 내성적이었고 나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I with some of my schoolmates joined together, and built a booth in a swamp, in a very retired spot, for a place of prayer.

학교친구들 몇몇과 함께 습지 안의 한 곳 으슥한 곳에 기도할 수 있는 거처를 지어놓았다.

And besides, I had particular secret places of my own in the woods, where I used to retire by myself; and was from time to time much affected.

게다가 숲속에는 내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장소가 있어서 혼자서 그곳에 가서 때때로 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My affections seemed to be lively and easily moved, and I seemed to be in my element when engaged in religious duties.

나의 정서는 들뜨고 쉽게 감동받는 것 같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빠져들었을 때에는 나의 근원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And I am ready to think, many are deceived with such affections, and such a kind of delight as I then had in religion, and mistake it for grace.

그래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서들에 현혹되어서 내가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그런 종류의 즐거움들 때문에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But in process of time, my convictions and affections wore off; and I entirely lost all those affections and delights and left off secret prayer, at least as to any constant performance of it; and returned like a dog to his vomit, and went on in the ways of sin.

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의 확신과 감정은 닳아져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흥분 속의 쾌감들을 잃어버리고 은밀한 기도시간도 갖지 않았다. 최소한 지속적으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또한 개가 그 뱉아버린 것을 다시 주워먹는 것처럼 죄된 생활들을 반복하였다.

Indeed I was at times very uneasy, especially towards the latter part of my time at college; when it pleased God, to seize me with a pleurisy; in which he brought me nigh to the grave, and shook me over the pit of hell.

물론 때때로 특별히 대학생활의 말기쯤에 와서는 이런 나의 상태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 졌다.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지옥구덩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And yet, it was not long after my recovery, before I fell again into my old ways of sin.

하지만, 회복되자 곧 옛날 저질렀던 죄악으로 되돌아 갔다.

But God would not suffer me to go on with any quietness; I had great and violent inward struggles, till, after many conflicts with wicked inclinations, repeated resolutions, and bonds that I laid myself under by a kind of vows to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엄청나고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악한 내적 경향들과 씨름한 후에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From my childhood up, my mind had been full of objections against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in choosing whom he would to eternal life, and rejecting whom he pleased; leaving them eternally to perish, and be everlastingly tormented in hell. It used to appear like a horrible doctrine to me.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해서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두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But I remember the time very well, when I seemed to be convinced, and fully satisfied, as to this sovereignty of God, and his justice in thus eternally disposing of men, according to his sovereign pleasure.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주권적인 즐거움을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확신하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분명히 기억나기는 한다.

But never could give an account, how, or by what means, I was thus convinced, not in the least imagining at the time, nor a long time after, that there was any extraordinary influence of God’s Spirit in it; but only that now I saw further, and my reason apprehended the justice and reasonableness of it.

하지만,내가 어떻게 혹은 어떤 방편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순간도 없었고 되돌아볼 때에 그런 순간이 있었노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없었다.

However, my mind rested in it; and it put an end to all those cavils and objectio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확신에 안주하고 있었고 모든 의문과 반대에 종지부를 찍었었다.

And there has been a wonderful alteration in my mind, in respect to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from that day to this; so that I scarce ever have found so much as the rising of an objection against it, in the most absolute sense, in God’s strewing mercy to whom he will shew mercy, and hardening whom he will.

그리고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의 면에서 나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대해 보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주시고 거두실 자에게는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justice, with respect to salvation and damnation, is what my mind seems to rest assured of, as much as of any thing that I see with my eyes; at least it is so at times.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며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분명하게 확신되었서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과도 같게 여겨졌다; 최소한 때때로 그렇게 여겨졌다.

But I have often, since that first conviction, had quite another kind of sense of God’s sovereignty than I had then.

하지만, 그 첫번째의 확신 이후로 간혹 아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I have often since had not only a conviction, but a delightful conviction. The doctrine has very often appeared exceeding pleasant, bright, and sweet. Absolute sovereignty is what I love to ascribe to God. But my first conviction was not so.

그 이후로 간혹 하나의 확신으로서만 아니라 달콤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나는 사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 확신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The first instance that I remember of that sort of inward, sweet delight in God and divine things that I have lived much in since, was on reading those words, I Tim. 1:17.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적이면서 달콤한 즐거움, 그리고 그 이후 생활하던 중에 계속 겪었던 신성한 일들에 대한 추억의 첫 체험은 디모데전서1:17에 있는 말씀들을 읽었을 때였다.

Now un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wise God, be honou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정말로 오직 영원하시며, 영생하시고, 보이지 않으신 왕이시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이 무궁하시길 !

As I read the words, there came into my soul, and was as it were diffused through it, a sense of the glory of the Divine Being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영혼 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확산되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곧 그것은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었다;

a new sense, quite different from any thing I ever experienced before Never any words of scripture seemed to me as these words did.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전 어느 때에 겪어보지 못하였던 너무나도 다른 그 무엇이었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과 같이 여겨지지 않았었다(역자주: 그만큼 새롭게 여겨졌었다는 뜻)

I thought with myself, how excellent a Being that was, and how happy I should be, if I might enjoy that God, and be rapt up to him in heaven, and be as it were swallowed up in him for ever!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분은 얼마나 뛰어나신 존재이신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그 분에게로 환희로 올리워지게 된다면, 그 분 안에 영원토록 삼키워지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I kept saying, and as it were singing over these words of scripture to myself; and went to pray to God that I might enjoy him, and pray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from what I used to do; with a new sort of affection.

나는 계속 말하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계속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계속 즐거워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였었다. 새로운 종류의 정동(情動)이 넘치고 있었다.

But it never came into my thought, that there was any thing spiritual, or of a saving nature in this.

하지만, 이것 안에,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케하는 성질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From about that time, I began to have a new kind of apprehensions and ideas of Christ. and the work of redemption, and the glorious way of salvation by him.

그 어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종류의 인식과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An inward, sweet sense of these things, at times, came into my heart; and my soul was led away in pleasant views and contemplations of them.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내적이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내 영혼은 그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유쾌해지고 깊어졌다.

And my mind was greatly engaged to spend my time in reading and meditating on Christ, on the beauty and excellency of his person, and the lovely way of salvation by free grace in him.

내 마음은 그 분의 인격의 아름다우심과 뛰어나심, 그 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그 사랑스러운 방식에 대하여 독서하고 묵상하느라고 깊이 빠져서 시간을 보내었다.

I found no books so delightful to me, as those that treated of these subjects.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책들 외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Those words Cant. 2:1, used to be abundantly with me,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ly of the valleys.

아가서2장1절의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라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곤 했었다.

The words seemed to me, sweetly to represent the loveliness and beauty of Jesus Christ.

나에게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달콤한 말씀으로 여겨졌다.

The whole book of Canticles used to be pleasant to me, and I used to be much in reading it, about that time.

아가서 전체가 나에게 유쾌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읽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었다;

and found, from time to time, an inward sweetness, that would carry me away, in my contemplations.

그리고는 때때로, 묵상 중에 나를 멀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곤 하던 어떤 내적인 달콤함을 발견하였다.

This I know not how to express otherwise,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than by a calm, sweet abstraction of soul from all the concerns of this world.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그 영혼의 달콤함;

and sometimes a kind of vision, or fixed ideas and imaginations, of being alone in the mountains, or some solitary wilderness, far from all mankind, sweetly conversing with Christ, and wrapt and swallowed up in God.

때로는 어떤 종류의 비젼, 혹은 어떤 사람과도 단절되어서 홀로 산 중에 있거나 외로운 광야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 감싸여서 삼키워지는 것 같은 비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The sense I had of divine things, would often of a sudden kindle up, as it were, a sweet burning in my heart; an ardor of soul,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내가 가졌던 이런 감각은 간혹 사실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내 마음 속에 달콤하게 타오르기도 하였다. 영혼의 그 향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Not long after I first began to experience these things, I gave an account to my father of some things that had passed in my mind.

이런 일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마음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I was pretty much affected by the discourse we had together; and when the discourse was ended, I walked abroad alone, in a solitary place in my father’s pasture, for contemplation.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에 아주 고무되어서 대화가 끝나자 나는 밖으로 혼자 나와서 농장의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기 위해서 찾았다.

And as I was walk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and clouds, there came into my mind so sweet a sense of the glorious majesty and grace of God,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그곳을 걸을 때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I seemed to see them both in a sweet conjunction; majesty and meekness joined together; it was a sweet, and gentle, and holy majesty; and also a majestic meekness; an awful sweetness; a high, and great, and holy gentleness.

장엄함과 겸손함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런 달콤함 결합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또한 장엄한 겸손함이었다. 위엄스러운 달콤함이었고 또한 지고하며 위대한 그리고 거룩한 부드러움이었다.

After this my sense of divine things gradually increased, and became more and more lively, and had more of that inward sweetness.

이 일 후에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더 생동감이 있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이 증가되었다.

The appearance of every thing was altered; there seemed to be, as it were, a calm sweet cast, or appearance of divine glory, in almost every thing.

모든 일들이 변화되었다; 사실 거의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형물처럼 여겨졌다.

God’s excellency, his wisdom, his purity and love, seemed to appear in every thing; in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clouds, and blue sky; in the grass, flowers, trees; in the water, and all nature; which used greatly to fix my mind.

하나님의 뛰어나심, 그 분의 지혜,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이 모든 사물 속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태양 속에서,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 구름 속에서, 그리고 푸른 하늘 속에서; 잔디, 꽃들, 나무들 속에서; 물 속에서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랬다; 이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이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러했다.

I often used to sit and view the moon for continuance; and in the day, spent much time in viewing the clouds and sky, to behold the sweet glory of God in these things; in the mean time, singing forth, with a low voice my contemplations of the Creator and Redeemer.

간혹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신 분을 묵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부르곤 하였다.

And scarce any thing, among all the works of nature, was so sweet to me as thunder and lightning; formerly, nothing had been so terrible to me.

모든 자연의 작품들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에게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둥과 번개조차 그러했다.

Before, I used to be uncommonly terrified with thunder, and to be struck with terror when I saw a thunder storm rising; but now, on the contrary, it rejoiced me.

이전에는 천둥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정반대로, 그것을 보면 즐거워 졌다.

I felt God, so to speak, at the first appearance of a thunder storm; and used to take the opportunity, at such times, to fix myself in order to view the clouds, and see the lightnings play, and hear the majestic and awful voice of God’s thunder, which oftentimes was exceedingly entertaining, leading me to sweet contemplations of my great and glorious God.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천둥번개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을 느꼈다; 그 천둥이 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구름을 보려고 집중해 서는 번개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하나님의 천둥의 그 장엄하고 위엄스러운 음성을 듣곤 하였다. 때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의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는 데로 나를 인도하였다.

While thus engaged, it always seemed natural to me to sing, or chant for my mediations; or, to speak my thoughts in soliloquies with a singing voice.

이렇게 몰두하는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묵상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혹은 노래부르는 듯 혼자서 조용히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아 놓았다.

I felt then great satisfaction, as to my good state; but that did not content me.

나는 그 당시 나의 좋은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지는 않았다.

I had vehement longings of soul after God and Christ, and after more holiness, wherewith my heart seemed to be full, and ready to break; which often brought to my mind the words of the Psalmist, Psal. 119:28.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였고 더욱 거룩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마음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고 넘치는 것 같았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편119:28절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곤 할 정도였다.

My soul breaketh for the longing it hath.

나의 영혼은 원하는 바 그 열망으로 상하여졌다.

I often felt a mourning and lamenting in my heart, that I had not turned to God sooner, that I might have had more time to grow in grace.

간혹 내 마음 속에 보다 더 일찍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음을 애닮아 하는 슬픔과 비애를 느껴서 더욱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 하였다.

My mind was greatly fixed on divine things; almost perpetually in the contemplation of them.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몰두하였다; 그것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묵상하였다.

I spent most of my time in thinking of divine things, year after year; often walking alone in the woods, and solitary places, for meditation, soliloquy, and prayer, and converse with God; and it was always my manner, at such times, to sing forth my contemplations.

거의 모든 시간을 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수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었다. 때로는 숲속 길을 홀로 걸으면서 때로는 나 홀로 있는 장소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명상 중에 찬양이 튀쳐 나오는 것이 나의 생활이었다.

I was almost constantly in ejaculatory prayer, wherever I was.

언제나 대부분 자연스럽게 기도가 터쳐 나왔다.

Prayer seemed to be natural to me, as the breath by which the inward burnings of my heart had vent.

마치 나의 내적 심령의 타오름이 내뿜는 숨결처럼 기도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The delights which I now felt in the things of religion, were of an exceeding different kind from those before mentioned, that I had when a boy; and what I then had no more notion of, than one born blind has of pleasant and beautiful colors.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전의 것은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총천연색깔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갖는 그런 차원의 것이었을 뿐이다.

They were of a more inward, pure, soul animating and refreshing nature.

이제 느끼는 것들은 보다 내적이고 순수하며 영혼의 활력을 주는 신선한 성격의 것이었다.

Those former delights never reached the heart; and did not arise from any sight of the divine excellency of the things of God; or any taste of the soul satisfying and life-giving good there is in them.

이전의 즐거움은 마음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신적인 뛰어남을 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그것들 안에 있어서 그 맛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역주: 이 이후의 기록은 1723년 뉴욕으로 건너가서 목회일을 시작하는 일들이 기록된다. 그의 전기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4 자신의 요약 1-8항

  1. In this refined way of trusting to my own works, and my own righteousness, (so zealously inculcated by the mystic writers,) I dragged on heavily, finding no comfort or heal therein till the time of my leaving England. on shipboard, however, I was again active in outward works; where it pleased God, of his free mercy, to give me twenty-six of the Moravian brethren for companions, who endeavored to show me a more excellent way. But I understood it not at first. I was too learned and too wise: so that it seemed foolishness unto me. And I continued preaching and following after and trusting in that righteousness whereby no flesh can be justified.

 

(신비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 그런 정교한 방식으로 나의 행위를 의지하면서 그리고 나의 의를 의지하면서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면서 아무런 위로나 치료책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아메리카를 향해서 떠났다. 하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선상에서 다시금 나는 외적 선행들을 열심으로 행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비하신 은총으로 기뻐하시길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안형제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나에게 그들은 더욱 훌륭한 길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처음엔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또한 너무 지혜로왔다: 그들의 조언은 나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어떤 육체도 의롭게 할 수 없는 그런 의를 설교하면서 그 의를 추구했고 또한 신뢰하였던 것이다.

  1. All the time I was at Savannah I was thus beating the air. Being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hich by a living faith in him bringeth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I sought to establish my own righteousness, and so labored in the fire all my days. I was not properly under the law; I knew that the law of God was spiritual; I consented to it, that it was good. Yea, I delighted in it, after the inner man. Yet was I carnal, sold under sin. Every day was I constrained to cry out, “What I do, I allow not; for what I would, I do not; but what I hate, that I do. To will is indeed present with me; but how to perform that which is good, I find not. For the good which I would, I do not; but the evil which I would not, that I do. I find a law, that when I would do good, evil is present with me; even the law in my members, warring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still bringing me into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사반나에 있는 동안 나는 그래서 계속 허공을 헛되이 치고 있었다. 살아있는 진짜 믿음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고 종일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일하였다. 나는 적합하게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적인 것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한 것인 줄을 동의하였다. 속사람을 따라서는 그것을 즐거워하였었다. 하지만, 나는 죄 아래 팔린 육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을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은 분명히 내 안에 있도다; 하지만,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느냐 그것을 알 수 없구나. 내가 행해야 할 선은 행하지 아니하면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악을 내가 행하고 있도다. 참으로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는데,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역시 내 안에 악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나의 지체의 법이 죄의 법 아래로 나를 계속해서 사로잡아가고 있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1. In this vile, abject state of bondage to sin I was indeed fighting continually, but not conquering. Before, I had willingly served sin; now, it was unwillingly; but still I served it. I fell and rose, and fell again. Sometimes I was overcome, and in heaviness; sometimes I overcame, and was in joy. For as in the former state I had some foretastes of the terrors of the law, so had I in this, of the comforts of the gospel. During this whole struggle between nature and grace (which had now continued above ten years) I had many remarkable returns to prayer, especially when I was in trouble. I had many sensible comforts, which are indeed no other than short anticipations of the life of faith. But I was still under the law, not under grace: the state most who are called Christians are content to live and die in. For I was only striving with, not freed from sin; neither had I the witness of the Spirit with my spirit, and indeed could not, for I sought it not by faith, but (as it were) by the works of the law.

 

이런 사악하고 비참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나는 물론 계속 힘써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즐거워하면서 섬겼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원치 않으면서도 섬겼다. 넘어졌다 일어섰는가 하면 또 넘어졌다. 때로는 무거움으로 압도당했다; 때로는 기쁨 가운데서 내가 이겼다. 이전 상태에서처럼 율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얼마 맛보기도 했었는데, 이런 기쁨 속에서는 복음의 위로를 맛보기도 하였었다. 자연과 은혜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이런 모든 투쟁의 기간 동안(거의 10여년간 진행되어 왔다) 나는 특별히 곤란을 당하는 경우에 여러 번 기도의 특별한 경험들을 하였다. 상당한 정도의 위로를 누리기도 했었고, 이런 것은 물론 신앙생활을 예기케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다.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만족한 채로 살며 또한 죽고자 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힘써 추구하고 있었을 뿐이지, 죄에서 해방된 것도, 나의 영과 더불어 성령의 증거를 가진 것도, 또한 가질 수도 없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그러했던 것이다.

 

  1. 11. In my return to England, January, 1738, being in imminent danger of death, and very uneasy on that account, I was strongly convinced that the cause of that uneasiness was unbelief, and that the gaining a true, living faith was the one thing needful for me. But still I fixed not this faith on its right object: I meant only faith in God, not faith in or through Christ. Again, I knew not that I was wholly void of this faith; but only thought I had not enough of it. So that when Peter Bohler, whom God prepared for me as soon as I came to London, affirmed of true faith in Christ, (which is but one,) that it had those two fruits inseparably attending it, “dominion over sin, and constant peace from a sense of forgiveness,” I was quite amazed, and looked upon it as a new gospel. If this was so, it was clear I had not faith. But I was not willing to be convinced of this. Therefore I disputed with all my might, and labored to prove that faith might be where these were not; especially where the sense of forgiveness was not: for all the scriptures relating to this, I had been long since taught to construe away, and to call all Presbyterians who spoke otherwise. Besides, I well saw no one could (in the nature of things) have such a sense of forgiveness, and not feel it. But I felt it not. If then there was no faith without this, all my pretensions to faith dropped at once.

 

영국으로 돌아온 1738년 1월, 사경 속에서 그리고 그때 겪었던 일에 심기가 불편한 채로 바로 그런 불편함이란 불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을 얻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에 고정시키지 못하였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그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이런 신앙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내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두셨던 피터 뵐러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이란 두 가지 열매 곧 “죄의 지배와 죄용서함 받은 것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지속적인 평화”의 이 두가지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랬고 그것을 새로운 복음이라고 간주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서 그것에 대해서 반대했고 이런 확신이 없어도 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었다; 특별히 죄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지금까지 무시하도록 가르침 받았던 성경구절들을 이것과 관계시켜보려고 하면서 다르게 설명하는 모든 장로교인들의 의견들을 참고하였다[역주: 아, 그가 이 참된 회심을 알고 있었던 장로교인들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그 당시에는 영국국교이든, 장로교인이든, 침례교회이든 영국의 영적 상태가 무척이나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된 회심에 대한 관심이 무척 저하되어 있어서, 여기서 웨슬레가 말하고 있는 참된 회심에 대한 무지가 장로교회교인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어느 누구도 이런 용서함 받은 느낌을 가질 수 없고 또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내가 느꼈던 것이다. 이런 용서함의 느낌이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라고 할 때 내가 믿음이 있노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은 당장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이다.

 

  1. When I met Peter Bohler again, he consented to put the dispute upon the issue which I desired, viz., Scripture and experience. I first consulted the Scripture. But when I set aside the glosses of men, and simply considered the words of God, comparing them together, endeavoring to illustrate the obscure by the plainer passages, I found they all made against me, and was forced to retreat to my last hold, “that experience would never agree with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those scriptures. Nor could I, therefore, allow it to be true till I found some living witnesses of it.” He replied, “He could show me such at any time; if I desired it, the next day.” And accordingly the next day he came with three others, all of whom testified of their own personal experience that a true living faith in Christ is inseparable from a sense of pardon for all past, and freedom from all present sins. They added with one mouth, that this faith was the gift, the free gift of God, and that he would surely bestow it upon every soul who earnestly and perseveringly sought it. I was not thoroughly convinced, and by the grace of God I resolved to seek it unto the end: — 1. By absolutely renouncing all dependence, in whole or in part, upon my own works or righteousness, on which I had really grounded my hope of salvation, though I knew it not, from my youth up. 2. By adding to the constant use of all the other means of grace continual prayer for this very thing — justifying, saving faith; a full reliance on the blood of Christ shed for me; a trust in him as my Christ, as my sole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

 

피터 뵐러를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토론하고 싶어했던 주제, 곧 성경과 체험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나는 먼저 성경을 상고하였다. 하지만, 신학적인 용어들을 제껴두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서로를 비교하면서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더 쉬운 구절들을 따라서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구절들이 바로 나 자신을 공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의 마지막 보루에 기대었었다. 그 보루란, “체험이란 이 성경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결코 일치 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기 까지는 그런 구절들을 참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노라는 것”이었다. 그는 답변하기를, “내가 그것을 어느 때라도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내일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음 날 그는 세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믿음이 지난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느낌, 그리고 현재의 모든 죄들로부터 자유하다는 것과 불가분리하다는 것을 간증하였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첨가하기를, 이런 신앙은 선물, 곧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진정으로 그것을 구하고 끝까지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철저하게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것을 끝까지 추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 1. 부분적으로건 전적으로건 나 자신의 행위나 의에 의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젊은 시절부터 내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포기함으로. 2. 모든 다른 은혜의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일, 의롭게 하는, 구원케 하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 계속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바로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분을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영혼의 의로우심, 거룩하심, 그리고 구속으로 신뢰하는 것이었다.

 

  1. I continued thus to seek it (though with strange indifference, dullness, and coldness, and unusually frequent relapses into sin) till Wednesday, May 24th. I think it was about five this morning that I opened my Testament on those words: [note: here follows a line of Greek] “There are given unto us 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 even that ye should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2 Pet. i, 4. Just as I went out, I opened it again on those words: “Thou art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In the afternoon I was asked to go to St. Paul’s. The anthem was, “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 Lord, hear my voice. O let thine ears consider well the voice of my complaint. If thou, Lord, wilt be extreme to mark what is done amiss, O Lord, who may abide it? But there is mercy with thee; therefore thou shalt be feared. O Israel, trust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mercy, and with him is plenteous redemption. And he sha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sins.”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도 무관심에 빠지고 지겹고, 냉냉하고, 또한 자주 죄로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계속 5월 24일 수요일까지 그것을 구해 왔었다. 그날 아침 5시경으로 생각한다. 성경책을 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다:[주,여기에 헬라어로 성경구절이 적혀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 하셨으니”. 집밖으로 나가자 마자, 성경을 다시 펴서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말씀을 읽었다. 오후에 세인트 폴 성당에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곳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내용은 이렇다: “깊음 속에서 주를 내가 불렀나이다: 주여, 나의 기도에 응답하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만약 주께서 인생의 실수를 기억하신다면 누가 주 앞에서 견딜 수가 있겠나이까? 하오나 주께는 자비가 있사오니; 주께서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이스라엘아, 주만 신뢰하라: 주에게 자비하심이 있고, 그에게 구속이 넘치는도다. 또한 주께서 그 모든 죄악들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로다”

 

  1.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1. 15. I began to pray with all my might for those who had in a more especial manner despitefully used me and persecuted me. I then testified openly to all there what I now first felt in my heart. But it was not long before the enemy suggested, “This cannot be faith; for where is thy joy?” Then was I taught that peace and victory over sin are essential to faith in the Captain of our salvation; but that, as to the transports of joy that usually attend the beginning of it, especially in those who have mourned deeply, God sometimes giveth, sometimes withholdeth them, according to the counsels of his own will.

 

나는 전심으로 특별하게 나를 기만적으로 이용해 먹었던 사람들, 나를 그렇게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간증하였다. 하지만, 곧 이어서 나의 적이 암시를 주었다. “이것은 믿음일 수 없어; 어디에 기쁨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는 분을 믿는 믿음에 본질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 구원의 시작에 보통 동반되는 황홀한 기쁨은 깊이 탄식하는 자들 속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뜻하신 바를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주시기도 하고 또한 거두시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16. After my return home, I was much buffeted with temptations; but cried out, and they fled away. They returned again and again. I as often lifted up my eyes, and he sent me help from his holy place. And herein I found the difference between this and my former state chiefly consisted. I was striving, yea, fighting with all my might under the law, as well as under grace; but then I was sometimes, if not often, conquered: now I was always conqueror.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러가지 유혹들에 지쳐버렸다; 하지만, 크게 외쳤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유혹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눈을 들어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 거룩하신 곳으로부터 도우심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이런 것과 이전의 상태 사이에 있었던 차잇점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예,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씨름하였는데 은혜 아래에서건 율법 아래에서건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 때때로(sometimes), 자주(often)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복당하였었다: 이제는 언제나(always) 정복자였다[역주, 이 부분은 웨슬레의 회심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분분한 의견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가 이 ‘알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언제나 정복자였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분석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그의 모든 ‘마음’ 속에서 아무런 ‘죄의 유혹조차’ 없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죄의 유혹은 있었는데, 그 유혹에 ‘마음’으로라도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는 의미인가? ‘마음’으로는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는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웨슬레가 추구해 온 것인 ‘내적 거룩함’이었기 때문에, ‘마음으로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해석이 지지를 받는데, 과연 그러한가, 또는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에 남게 된다. 웨슬리 자신이 비록 ‘완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흠한 상태, 죄없는 상태로 있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을 참고해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1. Thursday, May 25th. —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 and I found all my strength lay in keeping my eye fixed upon him, and my soul waiting on him continually. Being again at St. Paul’s in the afternoon, I could taste the good word of God in the anthem, which began, “My song shall be always of the loving kindness of the Lord: with my mouth will I ever be showing forth thy truth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Yet the enemy injected a fear, “If thou dost believe, why is there not a more sensible change?” I answered, (yet not I,) “That I know not. But this I know, I have now peace with God. And I sin not to-day, and Jesus my Master has forbid me to take thought for the morrow.”

 

5월 25일, 목요일, 눈을 뜬 순간,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서 나의 눈을 그 분에게 고정시키고 있고, 나의 영혼은 계속해서 그 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후에 다시 세인트 폴 성당에 가서 부르게 된 찬송에서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언제나 주의 사랑에 풍성하신 친절을 노래하겠네:입술을 열어서 주의 진리를 영원히 전하겠노라.” 하지만 원수가 다시 두려움을 집어넣었다. “진짜로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왜 더욱 느낄 만한 변화가 없단 말인가?” 내가 대답했다,( 아니 답변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내일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금하시고 있어.”

 

  1. “But is not any sort of fear,” continued the tempter, “a proof that thou dost not believe?” I desired my Master to answer for me, and opened his book upon those words of St. Paul: “Without were fightings, within were fears.” Then, inferred I, well may fears be within me; but I must go on, and tread them under my feet.

 

“하지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유혹자가 계속해서 소곤거렸다, “…네가 참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게 아니니?” 나의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답변해 주시길 원했다. 그 분의 책을 열어서 사도바울의 이런 말씀을 발견하였다. “밖으로는 싸움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 이 말을 읽고는 생각하였다. 흠, 내 안에 비록 두려움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계속 나아가야지, 그 두려움을 내 발 밑에 밟아 문대버려야지.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3 자신의 요약 1-7항

Mr. Wesley’s Conversion

 

 

웨슬리의 회심

 

http://www.gbod.org/worship/default.asp?act=reader&item_id=5951&loc_id=639,624

 

 

아래의 글은 웨슬리의 회심사건 백주년을 기념해서 The Methodist Magazine and Quarterly Review (Volume XX.New Series, Vol.IX,1838,New York: T.Mason and G.Lane, p.321-326)지에 실린 그의 일기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인데, 실상은 자신의 회심사건을 회상하면서 좀 더 보충하고 확대설명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자신이 직접 자신의 회심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그의 회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     *     *

 

(인용)

 

Monday, Tuesday, and Wednesday I had continual sorrow and heaviness in my heart; something of which I had described, in the broken manner I was able, in the following letter to a friend: —’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나는 계속 슬펐고 마음이 무거웠다; 할 수 있는 한 퉁명스럽게 무언가를 나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나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O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

 

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실까? 주님께서는 보내실 자를 보내실거야.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실거야.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이니깐.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ob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 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What occurred on Wednesday, the 24th, I think best to relate at large, after premising what may make it the better understood. Let him that cannot receive it ask the Father of lights that he would give more light to him and me.

 

바로 그 24일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그 일을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한 뒤에야 설명해야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은 빛들의 아버지 되시는 분에게 구하길 바란다.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더욱 많은 빛을 달라고.

 

  1. I believe, till I was about ten years old, I had not sinned away that “washing of the Holy Ghost” which was given me in baptism, having been strictly educated, and carefully taught that I could only be saved “by universal obedience, by keeping all the commandments of God;” in the of which I was diligently instructed. And those instructions, so far as they respected outward duties and sins, I gladly received and often thought of. But all that was said to me of inward obedience or holiness I neither understood nor remembered. So that I was, indeed, as ignorant of the true meaning of the law as I was of the gospel of Christ.

 

나는 열살 정도 되기까지 유아세례시에 베풀어졌던 ‘성령의 씻으심’을 전혀 더럽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받았고 오직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준행하는 모든 면에서의 복종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외적인 의무들과 죄들에 관해서라면 그러한 가르침들을 나는 즐겁게 받아들였고 종종 묵상하곤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나 거룩에 관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처럼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무지했었다.

 

  1. 2. The next six or seven years were spent at school; where, outward restraints being removed, I was much more negligent than before, even of outward duties, and almost continually guilty of outward sins, which I knew to be such, though they were not scandalous in the eye of the world. However, I still read the Scriptures, and said my prayers, morning and evening. And what I now hoped to be saved by was, 1. Not being so bad as other people. 2. Having still a kindness for religion. And, 3. Reading the Bible, going to church, and saying my prayers.

 

그 이후 5,6년 동안은 학교생활을 했다; 외적인 규제가 제거되어진 학교생활에서는 외적인 의무들을 행하는 것에서조차도 이전보다 많이 게을러졌다. 그래서 거의 매일같이 외적인 죄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졌다. 비록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내가 보기로는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성경을 읽기는 하였고 기도도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그때 구원받기 위하여 바랬던 것은, 1.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악하지 않는 것, 2. 종교에 대해서 관대할 것, 그리고 3.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니고,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 등이었다.

 

  1. Being removed to the university, for five years, I still said my prayers, both in public and private, and read, with the Scriptures, several other books of religion, especially comments on the New Testament. Yet I had not all this while so much as a notion of inward holiness; nay, went on habitually and, for the most part, very contentedly, in some or other known sin; indeed, with some intermission and short struggles, especially before and after the holy communion, which I was obliged to receive thrice a year. I cannot well tell what I hoped to be saved by now, when I was continually sinning against that little light I had, unless by those transient fits of what many divines taught me to call “repentance.”

 

대학에 진학해서 5년 동안 여전히 나는 공적모임이나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성경과 더불어서 다른 경건서적들을, 특별히 신약성경주석들을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적인 거룩함의 개념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니, 습관적으로 행하였을 뿐 대부분 얼마간의 감추어진 죄나 드러난 죄조차도 제법 만족하면서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특별히 성찬식을 갖기 이전이나 직후에 간단히나마 괴로워 하고 회개하기도 하였다. 일년에 세번씩 성찬식에 참여해야 했었다. 그 무럽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내 안에 있었던 아주 조그만 빛에 대항해서 계속 죄를 범하고 있었다. 수많은 경건한 분들이 나에게 “회개”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준 그 순간적인 발작행동을 때때로 일으키면서.

 

  1. When I was about twenty-two, my father pressed me to enter into holy orders. At the same time the providence of God directing me to Kempis’s “Christian Pattern,” I began to see that true religion was seated in the heart, and that God’s law extended to all our thoughts, as well as words and actions. I was, however, very angry at Kempis for being too strict, though I read him only in Dean Stanhope’s translation. Yet I had frequently much sensible comfort in reading him, such as I was an utter stranger to before; and meeting likewise with a religious friend, which I never had until now, I began to alter the whole form of my conversation, and to set in earnest upon a new life. I set apart an hour or two a day for religious retirement. I communicated every week. I watched against all sin, whether in word or deed. I began to aim at, and pray for, inward holiness. So that now, “doing so much, and living so good a life,” I doubted not but I was a good Christian.

 

22살 무렵 부친께서 나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종용하셨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섭리 중에 아 켐피스의 “Christian Pattern”이란 책을 읽게 하셔서, 참된 신앙이란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들의 말이나 행동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생각에도 미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 켐피스의 글을 나는 Dean Stanhope의 번역판으로 읽었을 뿐이면서도 나는 아 켐피스가 너무 엄격하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편안함을 맛보았다. 이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적인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인데, 나는 이때부터 나의 생활들을 전면적으로 변경시켜 보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삶을 진지하게 시작해 보려고 하였다. 하루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을 신앙적인 훈련을 위해서 홀로 지내려고 하였다. 매 주일 성찬에 참여하였다. 말이나 행동의 어떤 죄도 짓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적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1. Removing soon after to another college, I executed a resolution which I was before convinced was of the utmost importance, shaking off at once all my trifling acquaintance. I began to see more and more the value of time. I applied myself closer to study. I watched more carefully against actual sins. I advised others to be religious, according to that scheme of religion by which I modeled my own life. But meeting now with Mr. Law’s “Christian Perfection,” and “Serious Call,” (although I was much offended at many parts of both, yet) they convinced me more than ever of the exceeding height, and breadth, and depth of the law of God. The light flowed in so mightily upon my soul that every thing appeared in a new view. I cried to God for help, and resolved not to prolong the time of obeying him as I never had done before. And by my continued “endeavor to keep his whole law,” inward and outward, “to the utmost of my power,” I was persuaded that I should be accepted of him, and that I was even then in a state of salvation.

 

다른 대학으로 옮겼을 때 나는 시시껄렁한 친교들을 당장 끊어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신이 되는 결심들을 실행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였다. 실제적인 죄들을 더욱 조심해서 경계하였다. 나 자신의 삶에서 성취하려고 하는 그 신앙의 체계들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건하게 살도록 조언하였다. 하지만 이제 윌리엄 로의 “Christian Perfection”과 “Serious Call”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율법의 그 뛰어난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훨씬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 영혼에 엄청나게 쏫아지는 빛 때문에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분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더 미루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 이전에 결코 그렇게 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그 분의 모든 율법을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행하려고 힘쓰는 그것으로” 나는 그 분에게 분명히 받아들였음직하고 또한 그 당시에조차도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1. In 1730 I began visiting the prisons, assisting the poor and sick in town, and doing what other good I could, by my presence or my little fortune, to the bodies and souls of all men. To this end I abridged myself of all superfluities, and many that are called necessaries of life. I soon became a by-word for so doing, and I rejoiced that “my name was cast out as evil.” The next spring I began observing the Wednesday and Friday fasts, commonly observed in the ancient church, tasting no food till three in the afternoon. And now I knew not how to go any farther. I diligently strove against all sin. I omitted no sort of self-denial which I thought lawful; I carefully used, both in public and in private, all the means of grace at all opportunities. I omitted no occasion of doing good: I for that reason suffered evil. And all this I knew to be nothing, unless as it was directed toward inward holiness. Accordingly this, the image of God, was what I aimed at in all, by doing his will, not my own. Yet when, after continuing some years in this course, I apprehended myself to be near death, I could not find that all this gave me any comfort, or any assurance of acceptance with God. At this I was then not a little surprised, not imagining I had been all this time building on the sand, nor considering that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which is laid by God, even Christ Jesus.”

 

1730년에 감옥방문을 시작했다. 읍내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고,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직접 찾아가거나 찾아갈 기회가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서 좋은 일을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나는 모든 사치품들을 제거하였고 필수품이라고 불려지는 많은 것들도 제거하였다. 나는 곧 그렇게 선행을 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름이 그렇게 놀림을 당하는 것”(my name was cast out as evil)을 기뻐하였다. 다음 해 봄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교회에서 행하여지던 거신데, 오후 세시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전진해야 할 지를 몰랐다.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열심으로 싸웠다.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유형의 자기부정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활용될 수 있었던 은혜의 모든 방편들을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조심스럽게 활용하였다. 선한 일을 행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 때문에 악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적인 거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선행들이 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행을 한 것은, 그 모든 일들 속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 인해서 내가 목적하였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 모든 것이 어떤 위안을 줄 수 있는 것도 혹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확신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모래 위에 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였고 어떤 인간으로도 놓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놓으시는 기초 곧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1. Soon after, a contemplative man convinced me, still more than I was convinced before, that outward works are nothing, being alone; and in several conversations instructed me how to pursue inward holiness, or a union of the soul with God. But even of his instructions, (though I then received them as the words of God,) I cannot but now observe, 1. That he spoke so incautiously against trusting in outward works, that he discouraged me from doing them at all. 2. That he recommended (as it were, to supply what was wanting in them) mental prayer and the like exercises, as the most effectual means of purifying the soul, and uniting it with God. Now these were, in truth, as much my own works as visiting the sick or clothing the naked; and the union with God thus pursued was as really my own righteousness as any I had before pursued under another name.

 

얼마 뒤에 어떤 생각이 깊으신 분이 내가 앞서 그 분을 만나기 전에 확신을 가졌던 것보다 더욱 확신을 갖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외적인 행위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나와 홀로 있을 때 그리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 내적인 거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였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1. 그는 외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너무 부주의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것들 모두를 전혀 행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2. 그 분은 나에게 영혼을 정화시키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정신적인 기도와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는데(실은 그것들 안에 결핍되었던 것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실상 이것들은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벌거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혀주었던 식의 내가 이전에 행하였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추구했던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실제로는 내가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추구했었던 나의 의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계속)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2

런던 알더스게이트거리의 어느 집회에서 가진 “이상한 뜨거움”

 

어거스틴의 회심은 루터에게 영향을 주고 루터의 회심은 바로 웨슬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과 같은 웨슬리의 회심기록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웠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하는 것이 약간은 “체험”을 강조한 측면이 있지만, 이런 강조는 바로 그 앞에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가 무엇인가 고려하면서 이 “체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의 “이상하게 뜨거워진 마음”의 체험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감정상의 체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삶과 그의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만 허락하시는 “마음의 변화”이요, “본성의 변화”입니다. 그것을 루터가 로마서서문에서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된 것을 읽을 때에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 뜨거움을 경험한 바로 다음날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내가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나의 주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이것이야말로 회심의 진수입니다. 회심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동반하고 또한 그 마음의 변화는 곧 입술로, 행동으로, 삶 속에서 실천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의 뜨거움은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면 당신의 나라를 이뤄가십니다. 그 나라의 성취는 바로 이 뜨거워진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시작이고 또한 만물의 변혁의 출발점이 되는 소이입니다. 이 웨슬리의 뜨거워진 마음이 바로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그로 인하여 주의 나라가 증거되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합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뜨겁게 하옵시고,

이 뜨거움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나에게서만 아니라,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도 약하여지지 않게 하옵소서.

 

Only to Him is Glory, Praise and the Kingdo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