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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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개요

창세기 14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한다.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내용은 단순한데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설교하기 좋은 장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전투에서 승리했고, 십일조까지 드렸다고 하니 얼마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설교하기에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설교하기 좋은 내용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할까?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서 말한대로 아브람의 일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믿음의 승리, 십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겪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건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다행히 아브람은 납치당했던 조카 롯을 무사히 구출했다. 조카가 납치당하는 일을 겪는 것도 흔하지 않겠지만, 무사히 구출하는 것은 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다는 건 곧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창세기 14장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잃은 해석이 된다. 14장은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다른 장과 연결이 안된다. 체계 없는 파편적인 해석이 된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은 교회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잘 다니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돈 문제, 집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계속 몰려온다. 교회 잘 안다녀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기도 많이하고, 예배 잘 참석하고, 전도하고, 방언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들부터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교인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때문에 교인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이런 비현실적인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세기 14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내용에서 보편성을 찾는다면 그건 무엇일까? 답을 말하겠다. 환난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환난을 피할 수 없다. 환난은 믿음이 좋거나 안좋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교회를 잘 나가거나 잘 안나가거나 상관 없이 모두에게 닥쳐온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환난을 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14장을 살펴보자.

요절 1. 창세기 14:16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의 조카 롯은 소돔에 살았다. 소돔처럼 풍요로운 지역은 탐내는 세력들이 있다. 세력들 간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분쟁 중에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브람은 이런 분쟁이 생길 걸 미리 예상했던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병사 318명을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멋지게 롯을 구출했다.

간략하게 기록해서 그렇지 아브람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소돔 지역에서 분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을 것이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내려 앉았을 것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뒤쫓을 때는 초조하고 긴장되었을 것이다. 기습해서 적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출했을 때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건 단순히 믿음으로 성공하는 내용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그걸 믿음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 내용은 인생의 환난에 관한 것이고, 환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을 예상했고 대비했다. 그래서 환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기독교 작가인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이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33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환난을 안 당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다. 단, 환난을 당하면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담대하라고 하셨다. 교회 잘 다니면 환난을 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그 생각을 버려라. 내가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안해서 전도를 안해서 봉사를 안해서 이런 환난이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라. 비성경적이고, 불필요하고, 어리석고, 틀린 생각을 버려라.

앞서 말한 스캇 펙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한국교회 교인들의 삶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거꾸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자기 배를 불리려고 성경을 왜곡한다. 쓸데 없이 죄책감을 일으킨다. 죄책감은 죄의 각성과 다르다. 죄책감은 바깥에서 찌르는 것이고, 죄의 각성은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죄책감은 파괴적이고 죄의 각성은 건설적이다. 죄책감은 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환난이란 건 개인의 믿음의 정도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문제이다. 이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어떤 모양으로든 찾아올 수 있다. 아브람처럼 환난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요절 2. 창세기 14:18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은 적을 물리치고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7:3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한마디로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한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비중있는 배우가 다른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걸 까메오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까메오로 출연한 것이다. 아브람은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아브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근거는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6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또 만나게 된다. 그건 다시 설명하겠다. 안타까운 건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십일조에 맞춰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중요한 건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 보자. 아브람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롯을 무사히 구출해도 돌아왔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분을 만났다.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말이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승리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드리고 싶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전체를 드렸다는 의미가 된다.

왜 예수님은 여기에 나타나셨을까? 환난 가운데 함께 하고 돕기 위해서이다.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스포츠 경기장에 관중이 들어찬 것과 같다.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응원하는 관중이 기다리는 것과 같다.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의미이다.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그만큼 환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눈물 흘리게 한다. 예수님이 여기서 깜짝 등장하신 이유는 그만큼 이 과정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망을 갖자. 뜻밖의 동행,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환난은 왜 찾아 올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성경에서 환난은 에덴동산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인생에서 환난은 필수과목이다. 너무나 큰 환난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환난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환난이 필수라는 말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많은 경우, 환난이 나를 성장시켜준다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성장하게 되면, 환난은 일종의 수업료가 된다. 좋은 수업은 수업료가 비싸다. 배움이 크면 수업료가 아깝지 않듯이 크게 성장하면 환난도 아프지 않게 된다.

환난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환난을 가장 잘 극복하는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것은 환난 중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이걸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 요한계시록 7:14이다.

요한계시록 7:14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큰 환난’은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큰 환난’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종말에 있을 ‘대환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대환난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그 큰 환난’을 ‘인생’이라고 해석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큰 환난’이다. 인생이라는 큰 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바란다.

정리

창세기 14장의 주제는 “믿음이 좋으면 형통한다, 십일조 잘내자”가 아니다. “인생에는 환난이 있다”가 주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이 찾아올 걸 알고 대비했다. 미리 훈련시킨 병사를 데리고 조카 롯을 구출했다. 인생에 환난이 반드시 있고, 그걸 대비하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바른 태도이다. 환난은 신앙의 정도와 상관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대비하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으로 등장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감사드렸다. 환난은 큰 고통을 주지만, 환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면 그를 도우신다.

적용

누구나 평온하고 형통한 인생을 원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환난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다. 환난은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코스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수도 있다. 두려워서 피하려고 싶다. 신앙생활 잘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환난은 에덴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점이다. 피해갈 수 없다.

환난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환난 당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라. 환난에 맞설 때 예수님이 도우신다. 환난 가운데 예수님이 깜짝 등장하신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응원하기 위해서. 환난 가운데 소망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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