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2_[교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1

Contents

# 본문

사도행전 7:55~60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핵심 구절(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 설교 듣기

# 한줄 요약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0. 예수님은 길이고 문이다

교회 역사에는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을 보내서 오류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현대에 다수의 기독교인이 잘못알고 있는 가르침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조금씩 강조점은 달랐지만 반복된 일입니다.

4세기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이단 사상을 만들어 교회를 부패시킬 때 아타나시우스란 사람이 나와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아다나시우스 때문입니다.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주셨습니다.어거스틴의 책은 지금 박사학위를 몇 개 받은 사람이 읽어도 위대한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된 사람이 그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참으로 위대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에 하나님은 마틴 루터와 칼빈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킨 것입니다. 1521년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누가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목숨 걸고 우리가 믿는 은혜의 복음을 밝혀냈습니다.1

8세기 영국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를 일으키시고 조지 휫필드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 복음을 전하고 영국 사람들이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침례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곤두박질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스펄젼 목사님을 세워주셔서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종교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을 만나러 가는 유일한 길(요 14:6)이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요 10:7)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중요한 건 “하나님을 믿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존재한다” 혹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이 기독교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의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란 죄와 심판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것으로 인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으로 기독교인은 죄의 각성을 통해서 양심이 살아납니다. 죄를 지어도 괴롭지 않던 사람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죽은 뒤에 막연하게 좋은 곳에 갈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져 살던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을 감수하고 살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이끌어서 신비롭게 상호작용합니다. 인간의 측면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살 길을 찾아가다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고 간증을 듣기도 했지만, 죄와 심판의 각성이 일어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기본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는데, 자기객관화는 커녕 유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와서 간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눅 16:30~31)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인간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믿음은 정보 습득, 교리 이해,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던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오늘 본문 조금 위에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식과 예수 의식을 분간 못할 정도로,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통해 자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광신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사상이나 자기 암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을 붙잡고 인도하시던 사상 가장 강렬한 인격이신 예수에게 사랑을 받고 열애(熱愛)하고 있다. 열 번 죽어도 아쉬운 마음뿐이다. – 예수칼럼 김준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옆에 계신 거니까 비서같은 역할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은 보좌 옆입니다. 비서는 같은 보좌 옆에 있을 수 없고 아래에 있습니다. 동등한 신분만 보좌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인 이유도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탄이 가장 알리기 싫어하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믿으면 악한 영이 파고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연 구원받은 자인가를 괴롭게 고민하던 존 번연은 어느 날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 갑자기 어떤 생각이 제 양심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이 제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네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 그리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모습이 영혼의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다리를 꽁꽁 묶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2.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예수님도 사랑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스데반도 최후에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무분별한 분노를 터뜨리거나 자기 중심적인 광기를 보여주는 교인이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려고 이익 단체처럼 시위를 하고 정치 집단처럼 선동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두려움 때문에 갖는 존경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존경심을 신앙으로 포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존경심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았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에서 가장 보기 힘든 사람이 기독교인일지도 모릅니다.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따르자고 주장하고 손해보더라도 사랑이 우선이라고 외치면, 스데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박해받은 것처럼 박해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회색 지대에 숨어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 코로 숨 쉬고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을 찾아 역사의 정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수채 구멍(말구유)으로 불청객처럼 오셨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찾아 물 한 잔을 청하여 그렇게도 낮게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만남을 위하여 닫혀진 문에 노크를 시도하신다. 예수는 전지 전능하신 분. 남을 구원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무능했고 천군 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나 위해 무능한 사형수가 되셨다. – 예수칼럼

3. 예수님은 길이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인 상태입니다.

(엡 2:1~5)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영으로 기독교인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기도하지 않고 확신 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늘과 지상이 구분이 없어집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이것은 시인 하이네의 물음이다. 이 물음 속에 종교와 철학과 도덕의 물음의 원점이 있는 것 같다. 누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나이다. 그런고로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는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고백이다. 예수를 모르고는 나도, 하나님도 모른다(파스칼).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요 14:9). – 예수칼럼 김준곤

00.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한 기도가 증거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제자인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처음에 언급했던 18세기 기독교의 위기를 구한 조지 휫필드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닳아 없어지는 사람이 됩시다.

찬양과경배. 195 언제나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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