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5_[고난주간] 예수님의 인격,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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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9:9 / 2018년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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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한줄 요약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개요

사순절 여섯 번째 주간입니다. 이번 주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는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토요일을 지나 주일에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 주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0. 왜 겸손해야 할까?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하면 쉽게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물건을 들고 있는지, 어느 장소에 있는지 등을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은 앞으로 구원자가 앞으로 오실 텐데 어떤 기적을 보여줄 것이고, 어떤 가르침을 베풀 것이고, 어떤 인격을 가질 것이다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믿으니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가 메시아인지가 좀 헷갈리는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보면서 대조를 해 보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돼요”라고 말하시겠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헤롯 대왕이라는 사람이 헬라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던 이스라엘을 지켜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해서 영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자기가 사는 시대에 매몰되어버립니다. 당시에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추종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우상으로 자리잡으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예언과 대조해 보면 헤롯 대왕이 메시아가 아닌 것이 드러납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격이 잔인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스가랴 말씀은 메시아 구별법 중에서도 인격을 통한 구별법을 알려줍니다. 사실 기적이나 가르침보다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겸손한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스가랴서에서는 메시아가 겸손한 분이라고 그 인격에 관해서 못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 후보에서 제외입니다. 물론 겸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이 사람이 ‘메시아’라는 핵심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기 때문에 메시아 구별법을 적용하면 합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메시아가 겸손하다는 말씀은 곧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 마음 속에 마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피조물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부흥을 이끌었던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책 중에 ‘겸손’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머레이 목사님은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로 세 가지를 애기합니다. 첫째 피조물이기 때문에, 둘째 죄인이기 때문에, 셋째 성도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겸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우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과학을 믿는 사람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더 인정할 것입니다. 사람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우주, 즉 자연에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마치 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넣은 ‘오염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마음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똑똑하고, 능력있고, 돈이 많으면 신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조종하려고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월이 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월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사람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가족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족 위에 군림하고 가족을 짓밟는 행동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마음 속에도 마치 제가 신처럼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마음이 오염된 것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이 오염인 것을 알아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주의 일부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2.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불의를 의미한다고 로마서를 인용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의’이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불의’라고 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주위 모든 사람에게 불의합니다. 살인, 사기를 치는 것은 당연히 불의이지만,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마땅히 나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기준말입니다. 그것이 어긋날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무시하고 심지어 잡아먹어도 나쁜게 아닙니다. 사람이 동물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강자가 더 강해지는 것이 선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도 정의와 평등을 외칩니다. 강자의 횡포를 불의하다고 항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누가 그 기준을 넣어두었는지 몰라도 그 기준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알지만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불의에서 건져줄 어떤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불의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전제로써 필수적입니다.

3. 성도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다음에는 교만해도 될까요?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한번 하고 마는 이벤트가 아니라 영원한 변화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겸손을 추구하게 될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은 자연인은 겸손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잠시 겸손이라는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겸손이 인격의 일부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성도라면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성도의 겸손은 지금까지의 겸손과 다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겸손은 ‘섬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겸손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겸손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의 자기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적극적인 행동이었고,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론

겸손은 예수님 인격의 핵심입니다. 겸손은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의롭지 못해서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서로를 끌어내리는 진흙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강자가 우대받는 정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고 진리일 수 밖에 없고 진리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겸손을 포기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겸손을 포기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섬김을 실천함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만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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