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4_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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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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