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8_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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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05:01~15
2018년 01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개요]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합니다. 1절에 5장의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는 메지 말라’는 짧은 구절이 큰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의문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신앙이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봉사, 기도 등 모든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알려주는 자유로운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0. 피아노 치기 혹은 피아노 연주하기

저는 아이들하고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말장난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들한테 “아빠는 피아노 잘 친다”고하면, 아이들이 “아빠 피아노 못 치잖아”하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를 쿵쾅쿵쾅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잘 치는 거야”하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제가 쓸데 없는 장난을 한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잘 누른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자유’와 ‘자율’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즉, 피아노를 잘 두드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잘 두드려서 되지 않습니다.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아노를 눌러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숙달된 결과입니다. 피아노를 막 두드리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피아노를 악보에 따라서 누르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입니까? 피아노 두드리기는 훈련 없이 가능하지만, 피아노 연주하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된 자유를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힘들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율’은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자율’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5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율’이라는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갈라디아서 5장 뒷부분에서는 이 결론을 논증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6.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훈련된 자유’입니다. 무엇에 따라 훈련되어야 하냐면,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훈련하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지키라고 주신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고나서 율법은 모세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안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안지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예증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을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의미가 깊은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잘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5:6]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성경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7~12.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매우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계속 막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과 생각을 계속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한때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감동이 옅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은 할례였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확신’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할례가 있어야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할례는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할례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정통 기독교 어디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아니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르쳤다면, 가르친 분이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에 감격하고 그 분을 닮고자 열망하는 가운데 홀연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의 믿음의 자동적인 결과나 구원의 확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인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방언이 구원을 주지도 않고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게 하신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그 이름 그대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사역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령 운동, 예수님을 닮지 않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기적, 능력을 결코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사모하는 분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걸림돌을 치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3. 13~15. 사랑할 자유를 누리라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련을 해야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라 쇳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예배 속에 가장 잘 담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그거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고, 적용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원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자율은 훈련된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훈련될 때 아름답니다.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프레드릭 윌리엄 파라). 자유가 자신의 속박을 잃을 때는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속박이 된다(칼리 지브란)

스스로 사랑이라는 계명에 따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고려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동을 주는 것도 그것이 고된 자기 훈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악보를 가장 잘 연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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