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심 묵상] 마태복음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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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번째 성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부분 마가복음일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그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점만 말씀드리면 가장 짧고 단순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는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가가 글의 성격과 동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마태복음은 모태신앙인이나 어려서부터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또, 이 말은 구약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읽는 것이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앞에 배치된 이유도 구약 성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구약 성경을 충실하게 공부한 다음에 읽어야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믿음의 후손들이 복음을 계승하고자 그토록 애쓴 수고가 드디어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는 마태복음을 가르칠 때, 세 가지에 중점을 둡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 입학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입니다.

이 질문은 별표를 다섯 개는 그려야할 정도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기점으로 복음서가 둘로 나누어 지는데, 이 질문 앞부분은 ‘예수님은 누구인가?’가 주제이고, 뒷부분은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가 주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를 보일 때가 가끔 있는데, 이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수시니까 하수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전개를 하지 않으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세주로 확실하게 인정하는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심하게 꾸중을 듣는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나가서 기도 응답도 받고 신앙 체험도 해서 이제는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좋은데, 반대로 “어는 이제 고생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시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마 머리 끝까지 화가 날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잘 믿으면 형통하고 성공하는 일만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예수님이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설교하면 교회 안나갈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하고 형통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가르침이고, 성공하고 형통하지 못하면 기도를 많이 안했거나 능력을 못받았기 때문이라고 핀잔을 듣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일견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표출입니다. 성경은 예수 잘 믿으면 고난받고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믿음 좋은 사람들은 고생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형통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동시에 기도 많이하고 능력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인격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해가 안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의문의 답을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믿음이 좋을수록 고생하는 것이 정상이고 제대로 길을 들어 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이후에 베드로는 ‘무능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보다 능력이 없어지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까지 추락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회복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자기 발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사도행전을 복음서의 연장으로 보는데,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육체로 동행’하신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영으로 동행’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령’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실제로 ‘성령 충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비인격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님처럼 능력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친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성령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도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성령=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면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따로 논증하기로 하겠습니다. 기억하셔야 할 점은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베드로가 걸어간 ‘무능의 길’ 다른 말로는 ‘자기 발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교육은 ‘표준 교육 과정’입니다.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신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이 비인격적이고 눈쌀찌푸려지는 언행을 할까요? 예수님의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없이 스스로 성령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번영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육 과정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나름대로 바르게 신앙 생활했는데 고난이 계속되는 분들은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능력 없다고 무시한 사람이 사실은 잘못된 길, ‘번영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단, 혼란으로 인해서 갈지자로 걷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목표를 알고 가야만 침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약 성경과의 유기적 연결에 중점을 둡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은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 중에서도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셋째,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중점을 둡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 구약을 공부할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를 말씀드렸습니다. ‘5선’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 ‘5선’이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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