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회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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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본 목사님의 신앙 고백을 간추려서 편집하였다.

이 글의 원래 저자인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목사로서 희생적인 생애를 살다가 간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독교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저자는 전쟁의 참화로부터 일본을 일으켜 세우는데 공헌을 한 20명의 일본인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 국민 전체에 정신적 감화를 끼친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일본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짐으로서 지금도 그의 설교는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간추린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속에 비추어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영적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 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비웃게 되었는가? 왜 교회가 타협과 세속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적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승리와 평안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이 있다. 이번 기사는 진리를 더듬어 찾고자 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 줄 것이다.

 

도전, 실패, 그리고 좌절

 

깨어진 나의 첫 결심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도덕의 고결함과 위엄에 탄복하였다. 성경은 나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 유일한 책이었다. 내 말과 내 행실, 그리고 나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생활은 은근한 기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좋아하였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서까지라도 성공하기를 원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내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를 채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야심가였던 것이다. 내 생애의 목적은 비루하였고, 사상은 더러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의 모든 사상과 행실을 완전히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술, 담배, 극장 구경도 중단하겠다.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하였다. “굳게 결심한 이 마음,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 라는 결심과 함께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다고 굳게 믿었다.

한 동안 내 결심은 잘 실행되었다. 나의 개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말했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아침 기도는 뜨거웠고, 길었다. 나의 회심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했다. 어제까지의 떠버리가 이제는 침묵가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 속에는 회개의 눈물과 성경절의 인용이 있었다. 나는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생활을 살았다.

그 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독교인으로서의 겉모양만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행과 생각은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을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 마저 부자유스럽고 고통럽게 만들었다. “약간의 방종이 신앙에 무슨 해를 가져오겠는가? 지나친 침묵은 오히려 우울증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매 주일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무의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친 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이 목사와 저 신도의 결점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흉을 화제거리로 삼으면서 즐기는 나의 옛 습관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야고보가 말한대로 “한 혀로 주되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 하였다(약 3:10). 야고보가 기록한 그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양심은 끌로 쪼이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나의 말많은 습관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물론, 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렇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마귀도 그렇게 믿고 떨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면피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위선자이다. 참된 변화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기독교회의 신앙을 권하겠는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내 영혼에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내 영혼은 깊은 좌절과 고뇌의 미로를 헤메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부터 나는 영혼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방황하였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시작된 고뇌

하 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나의 마음과 생애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죄의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차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이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성경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다 너희가 아는대로 살인자는 누구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말씀 역시 진리였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미워하던 끝에 결국에는 아우를 죽이는 첫번째 살인자가 되었다. 증오는 결과적으로 살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형벌하실 때에는 죄의 결과로 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의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의지의 실행 여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를 보신다. 증오심이 언제나 살인이라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의 교육, 환경, 체면 등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의 법과 사회의 제재가 없고, 살인자는 저생에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이다. 그래서 존 번연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저 죄수는 존 번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증오심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이미 살인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살인죄의 선고를 내리시기로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도둑질은 절도나 강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릇 하늘이 베풀지 않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학식과 재능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뇌물로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면, 그것은 그 직위와 봉급을 도둑질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도 않으셨는데, 내 스스로 목사가 되어 성직의 권위와 존엄성을 사용한다면, 나는 엘리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성직에 따르는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다. 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의해서 정죄당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는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한 자였다. 성경이라는 빛으로 나를 살펴볼 때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다지 큰 고통이 없었는데, 죄와 죄의 결과를 안 후로는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나를 압도하였다. 그런데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 신의 죄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돌팔이 목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멸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계명을 지키고,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은 원래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후회하고 또한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답니다. 그런 다음,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비록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니 안심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십시요”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인가? 정말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경험이란 말인가? 율법을 범한 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성경이 약속하는 평안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 미신과 오류 속에서 양심을 기만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의 실망과 외로움

 

교회 안에서의 외로움

오 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조차 외로움과 설움을 맛보게 된다. 내가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사기로서 나를 맞아 준다. 그들이 내게 속옷을 구할 때에 내가 겉옷까지 벗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신발과 모자까지 달라고 한다. 나의 정직을 이용하여 그들은 나를 그들의 편리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가끔씩 내가 교회를 위하여 곧바른 말을 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몰아부쳤다. 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는 나에게 죄를 강요하고 있다.

죄 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고자 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대담한 무법자로 양육시켜 가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를 안내해 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지옥불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 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내가 동으로 가도 그가 계셨고, 서로 가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역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목사가 말하기를 “아마도 당신은 악마의 종이 되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망죄술로 사용된 봉사와 희생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나 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고통을 잊기로 결심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 이상의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선과 봉사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조 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하라!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시에 단 두마디의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그의 미친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과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하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마지막 시도, 목사의 길

자 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같은 결과가 생길까봐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기독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터, 나는 “결코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야” 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게 아무리 천한 직업을 주시더라도 제발 목사는 되지 않게 해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다. 물론,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목사직을 택하여 Rev.(경건한 목사) 라는 명칭을 내 이름 앞에 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마차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여러번 다짐하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추수할 사람이 너무나 적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여러 사람이 이러한 말로서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리빙스턴과 같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나에게 그러한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면, 나는 높으신 부르심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다.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깃발이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매우 적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전락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경쟁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 나님과의 기나긴 씨름 끝에 결국 나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사욕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교는 중세기 때의 수도원과는 전혀 달랐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 편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빈민 구호 병원에서 수련하던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 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새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 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 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정신적 사업을 위해서 기술적 훈련을 받는 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연극 배우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확신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연극 배우의 필수 연기가 아닌가?

하 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서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 바울의 사상을 꾸며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19세기 최대의 전도자인 무디 역시 세탁소의 일꾼이었다. 훌륭한 목사는 결코 신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학교가 만들어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그 렇다! 신학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신학교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공격하기 좋은 최대의 공격 목표이다. 신학교가 마귀의 공격 목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품성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귀는 그리스도의 거짓 대리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 의 죗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타조가 사냥꾼한테 쫓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면, 그 머리를 모래 속에 박고 그것으로서 온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죄를 범한 교인들은 심한 양심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을 목사와 신학자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잘 믿기만 하십시요.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라는 신학이다.

그 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냄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죗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오해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 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더러운 것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네가 어찌 선한 일에 대해서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효 도 선이고, 인 도 선이다. 그러나 효와 인은 선의 결과일 뿐이며,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선을 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 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 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인지를 알지만, 정치가들이 정권에 아부할 때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는 진리를 정확히 아는 장사꾼도 2원짜리 물건 두개를 5원에 팔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에 머리를 수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18:8. 사도 바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에 불과하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도 그들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정하는 진리대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대로 그대로 산다면, 이미 복음 사업은 끝마쳐졌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늘에 가있을 것이다.

 

나의 오해

하 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 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의심

세 상에 태어나서 속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한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는 믿음이라는 신성한 특성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잘 주어지지 않는듯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라고 요구한다. 인류는 하늘 아버지를 찾고 있다. 하늘에 걸려 있는 별들과 들에 핀 백합화가 모두 창조주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태풍과 지진과 독초를 보면서 의심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꿰뚫고 있음을 증거하지만, 사람들은 수천번의 전쟁과 노예 매매와 인종 학대와 종교 전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다는 의심의 미로를 헤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마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변화와 해방의 기쁨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 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 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 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 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 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 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

 

[출처] 다음블로그, http://goo.gl/CE31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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