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3_영웅시대의 숨은 영웅

영웅 시대의 숨은 영웅

본문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룻 1: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룻 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룻 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우울한 시작

새해가 되었습니다. 연말에도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분이 많았는데, 연초에도 연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오지 않은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사회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다보니 연말 혹은 연초라고 해서 긴장을 풀거나 여유를 즐길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새해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기침체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마음이 위축되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시대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옵니다. 룻기의 시대가 오늘날과 비슷한 그런 시대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었으면 합니다.

룻기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이 고함을 쳤답니다. “도대체 바다가 어디있냐?”고 말입니다. 바다 속에 살고 있다 보니까 바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오히려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만해도 자기 얼굴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자기자신이었습니다. 깨끗한 거울이 보급되기 전에는 자기 얼굴을 볼수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다가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 ‘이게 내 목소리 맞아?’하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는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는데, 자기 목소리에는 자기 몸을 통해서 울리는 소리가 대해진다고 합니다.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목소리만 듣게 되는 다른 사람이 듣는 소리와 조금 달라지는 것이지요. 결국 자기가 듣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듣는 목소리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모르게 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자기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고 이해하는 것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나 얼굴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에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멋 훗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룻기의 시작부분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객관화하고 재발견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웅 시대의 현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시대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영웅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은 “영웅이 많이 있던 시대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고, 일부만 그렇게 불렀지만 말입니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 같은 사람을 경제계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부 있습니다. 정치계는 더 논란이 있지만 일부에서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이 많으면 매우 행복하고 살기좋을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전쟁 기간 즉 난세에 활동했습니다.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사실은 혼란스럽고 살기 어려운 시대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시대니까 영웅이 필요하고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니까요. 영웅이 많은 시대가 살기좋은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니까 존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매우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 매우 큰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신앙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자 믿음에 따라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갔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구절에서 왕은 단순히 왕정제도를 통해서 왕으로 뽑힌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갔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사람을 추종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주장을 따라간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압지방으로 가족이민을 갔습니다. 그 가족 구성원의 생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나쁜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면 가족이민을 갔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신앙적 경제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요즘 이단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전에는 위축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포교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시대적으로 보면, 지난 시대 기독교에 원인이 있습니다. 지난 시대에 기독교가 행한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있는 목회자가 기독교 지도자가 많다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사시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시대의 구원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나 그들을 추종한 사람들이 조금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본받아라”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르 본받는 나를 본받으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의 행사에 갔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우상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교인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 혹은 교회성장을 보면서 나는 이 정도 존경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런 우상화와 대형화를 통한 마케팅 효과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같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저럴 수 없을 텐데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지 세가지 이유를 적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세가지 이유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은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고 생각에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위대해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 엘리멕렉 가족이 그러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들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택의 결과

이스라엘 사람은 모세 시대 하나님과 언약을 통해 얻은 땅, 이스라엘을 떠나면 안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떠나면 안됩니다. 엘리멕렉 가족이 그 사실을 몰라서 그랬는지 혹은 알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항상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줄기도 죽습니다. 잘못된 역사 위에서면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잘못된 삶을 살게 됩니다.

구속사에 사 즉,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최선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섣부르게 그들이 겪은 비극이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유는 욥기에 잘 나와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즉각적인 응보를 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에 심판을 유보하시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면,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을 말입니다. 외삼촌에게 바둑을 배울 때 최선을 다해서 한수한수 두었는데 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대했는데 지고 나니까 최선을 다해서 둔 한수한수가 패배로 가는 수만 둔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해서 두지 않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냐면 더 크게 진다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걸 한계라고 해야겠죠.

자기 최선을 대했다고 해서 바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하나님은 성경을 주셨고, 진리를 명백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명백한 진리를 거절한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 주장인지 누가 바른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데카르트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물건들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이 나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고민 끝에 발견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였습니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건 언제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가장 확실한 게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어떤 사람은 전도, 어떤 사람은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다 아는 얘기 같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배리칩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사실 제는 한참동안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666 표식을 베리칩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베리칩을 몸에 심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이 아니라 베리칩에 있다는 말입니다. 양보해도 예수님 플러스 베리칩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베리칩교입니다. 자신이 베리칩교를 믿고 있는데 베리칩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율법주의가 베리칩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다른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구원의 근거가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어떤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잘못된 선택으로 돈을 잃고 건강을 잃는 것도 비극이지만, 가장 큰 비극은 영혼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영웅 시대의 결말

영웅들의 시대가 어떻게 마무리 될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끝판왕 영웅이 나와서 적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입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에 삼손이 나오니까요. 삼손은 다른 사사와 다릅니다. 탄생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특별한 인물에게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무후무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사사였습니다. 이 사사가 사사시대를 마무리했을까요?

사람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렇게 지었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은 사사시대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아실현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자기 성공을 위해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재능을 받은 줄 알고 말입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 즉, 영웅시대의 결말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최고의 영웅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바로 룻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선택하신 이유는 룻이 전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녀가 영웅적인 일을 할 거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좀더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 혹은 엄청난 은사를 받은 목회자가 나타나면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가 흥왕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기대가 계속될 때 오히려 진정한 부흥과 기독교의 흥왕은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웅적인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반대로 영웅적인 사람을 기대하고 추종하고 있으니 엇박자가 납니다. “다윗같은 사람도 있지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윗이라는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도구였습니다.

그런 해석의 근거가 사실 룻기에서 비롯합니다. 룻기는 오늘 읽은 5절에서 완전한 절망을 줍니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시작하자마자 5분 안에 다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시청자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갈까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영웅시대의 완전한 종말입니다. 영웅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위대한 신앙인이 나타나서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세속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벌어졌던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중심이 된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낸 사람이 다름아닌 잔다르크입니다. 잔다르크가 관련된 세부적인 것은 해석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면에서 보자면 기사가 아닌 여인이 기사들의 전쟁을 끝내다는 의외의 결말을 알려줍니다.

절망이 주는 소망

영웅 시대는 숨은 영웅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마무리됩니다. 룻기가 그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우울하게 시작된 새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에 숨은 영웅입니다.

2019.07.14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앵콜)

2019년 07월 14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13:1-2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편으로 가면 배다리 호수가 있고, 그 호수 뒤편으로 눈에 띠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웅장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배다리 호수가 산책로를 잘 꾸며놔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러 자주 나오고, 도서관도 있어서 학생들도 많이 다닙니다. 도서관 맞은 편, 산책로 바로 옆에 있으니까 매우 좋은 위치입니다. 그 건물이 무슨 건물이냐면, 하나님의 교회 건물입니다. 이단교회 건물이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위치가 좋아서 그런지 제가 지나다니면서 보면 고급차가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그 교회를 지나가면 위축감이 느껴집니다. 이단교회라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신천지 때문에 교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교회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신천지 때문에 교회에 새로운 성도가 오는 것을 무조건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신천지가 침투할까봐 새로운 성도를 경계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신천지가 관심이 없어서 문제가 안되는데, 노회 큰 교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택역에서 흰 티를 입고 복음성가 비슷한 걸 입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선천지였습니다. 밝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전도하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이단이 이단이라고 해서 무시했고, 스스로도 움츠러들어서 몰래 전도했는데, 이제는 뒤바뀌어서 대놓고 전도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큰 틀에서 보자면 정통 교회가 권위를 잃은데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권위를 잃으니까 이단이나 정통 기독교나 그게그거다 생각하게 되고 기독교인도 명분을 잃었습니다. 이단도 정통 기독교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정통 기독교가 실수한 일이 무엇일까? 입니다. 번영주의,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전도법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도법이 잘못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큰 교회, 건물을 보여주면서 웅장한 건물로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교회 건물이 전도 방법이다. 예배당을 잘 지어놓는 것이 가장 좋은 전도법이다 라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웬만한 정통교회 예배당보다 크고 멋있는 건물을 지은 이단교회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쁜 의도로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 십 여년 전에 했던 것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할 수 없어요. 큰 예배당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예배당을 지었고, 웅장한 건물은 하나님의 은혜고 복받은 증거라고 줄기차게 말했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우리는 외형적인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츤 건물, 많은 사람들의 지지, 인기, 명성, 평판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통교회에서 주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 제장 중 하나가 예수님께 예수님 이 건물 멋있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본문 1절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이 맞장구 쳐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치가 없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맞장구 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뚤어진 분이 아니였습니다. 이게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절

굉장히 섬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웅장한 건물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AD 1년입니다. 40여년 후인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수살렘을 침략해서 성전을 파괴하고 지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모든 건물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람들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때가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초기입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게 1948년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할 때 모였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민족으로 남았다는게 기적입니다.

어쨌든, 성전이 다 파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초고층빌딩 들어가시면 위축되시잖아요. 엘리베이터도 초고속입니다. 명품매장도 있고, 차들도 많이 다니고, 주차장도 넓고, 어떻게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을까? 감탄하게 합니다.

일반 건물도 위축감을 주는데, 종교 건물은 얼나나 위축감을 주겠습니다.

분당의 요한 성당, 서울의 명동 성당만 봐도 얼마나 웅장합니다. 그런 건물만 봐도 종교심이 우러나는데, 유럽의 대성당들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종교심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물 안에서 미사가 드려질 때, 수준 높는 성가대가 단정하게 예복을 입고, 성가를 부르면 없던 종교심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런 종교심을 깨뜨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종교심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굉장히 강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니네들 그런 것 의지하지 말아라. 그런 식으로 생겨난 종교심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어요. 약간 방향은 다르지만, 무엇이냐면, 엘리트주의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해야 한다. 신앙인이 높은 지위에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걸 보고 교회에 다니게 된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도 좋은 의도지만,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웅장한 건물도 있고, 평판있는 사람도 있고 그래야 전도도 되고 믿음도 생겨나지 않을까?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건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단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사회에서 비난을 받으니까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고, 목회자가 공격을 당하니까 걱정을 하고 기독교의 위기라고 말씀하시는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기 아니니까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비난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목회자가 안 되려고 할 테니까. 목회자는 그렇게 화려한 직업이 아닙니다. 화려함보다는 화려하지 않은 경우가 99%입니다.

교회도 비난을 받는데, 비난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이익단체처럼 되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고 어거지를 부립니다. 사회전체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고난받을 강해졌고, 비난받을 때 정결해졌습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는다고 걱정하거나 겁을 내는 것은 그 애정은 감사하지만, 불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모르고 하는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에 대해서 칭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꺽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눈에 보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존경하십니까? 젊었을 때는 성공한 사람들 존경하잖아요.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존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니까 존경심이 사라졌습니다.

불법과 사기를 서슴치 않고, 경쟁자를 꺾으면서 세운 왕국이더라구요.

경험이 쌓이다보니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존경스럽더라구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속에 남는 사람은 생각을 깨우쳐준 사람이더라구요. 제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비신앙으로는 백낙청교수가 있고, 신앙인으로는 마틴 루터 킹, 앤드류 머레이, 로이드 존스 같은 분이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평론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사랑의 힘이라는 설교로 생각을 깨우쳐 주었고,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으로 마음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다들 진리의 한 조각을 가기고 있다가 전달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본질

시간이 지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낡아지고 희미해집니다. 썩어집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변치 않는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들의 사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때로는 엑기스를 먹으면 맛을 못느낍니다. 희석된 것을 먹어야 맛을 알게 됩니다. 커피를 먹는데, 처음에는 믹스커피가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야 원두커피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진리의 핵심은 뭐냐면 대속의 사랑입니다. 대속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살면서 왜 힘들었냐면 대속을 실천하기 싫어서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잘못한게 명백하면 기가 삽니다. 니가 잘못했잖아.

아무리 고상한 척 하는 사람도 대속은 실천하지 못합니다. 니가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냐. 니 잘못은 니가 해결해라.

대속은 어렵습니다. 인격이 돼야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이냐면, 대속의 제사가 드리지는 곳입니다. 동물이 대속 제물로 죽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이 대속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건물을 보았잖아요. 인간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은 성전에서 인간이 지은 건물의 웅장함과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봄으로써 생겨난 종교심에 들떴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종교심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 성전에서 보아야 할 것은 웅장한 건물과 그 건물로 보고 생겨난 종교심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대속을 보았다면 마음이 들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쁜게 아니라 슬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쓴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왜냐하면, 대속은 우울하고 고민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기쁜게 아니라 슬프로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복받고 잘 살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제가 아쉬운 점은 이것입니다. 정통 기독교가 잘 나갈 때 이걸 가르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잘 나갈 때 많은 웅장한 예배당이 세워질 때 건물에 건물이 복받은 증거라고 가르치지 말고, 대속의 사랑을 보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입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부침이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도 그렇고 이단도 그렇습니다. 잘 나갈 때가 있고 쇠퇴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건과 건물들의 운명입니다. 잘나가는 이단들도 쇠퇴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이것이 참된 진리라고 깨달은 사람은 외형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기독교를 믿은 사람은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외적인 사건, 건물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보게 됩니다.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 초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겉보기에 위대해 보이는 어떤 것들을 보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느꼈던 그 감탄,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거 무너질 거야.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대한 것들을 보고 믿음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을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비난하고 욕할 때가 오게 됩니다.

대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존엄성을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지능 높은 동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류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대속의 사랑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들어온 하나님의 보석같은 선물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늘의 신비입니다.

2019.05.12_우리는어디를 향해 가는가?

2019년 05월 12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03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줄 요약]

5월입니다. 2019년이라는 해가 낯설다가 이제 조금 익숙해졌습니다. 날씨도 풀리고 새해에 가졌던 의욕도 아직 남아 있어서 열심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좋은 시간입니다. 올해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다면 이제 몰입해서 그 일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에 몰입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입니다. 방향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심히 일했지만 불필요한 일을 하는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가 비슷한 상황에서 설교된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광야 40년을 요약한 설교집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내용입니다. 목적은 제가 좀전에 말씀드린대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광야를 지나왔는데, 그 광야를 지나 온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우리가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인데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지나왔습니까? 우리가 지나온 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개요]

##1.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

1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적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목적이 있는 걱 여행이고, 목적이 없으면 방황이라고 합니다.

창조론은 목적론적 세계관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은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건 어떤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은 성공과는 다릅니다. 성공은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고 번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은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청소를 하다보니까 못보던 것이 떨어져 있었는는데 작은 나사못이 이었습니다.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 나중에 아이 장난감 자동차를 보니 건전지를 덮고 있는 플라스틱판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사못이 풀려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사못이 작은 것이라서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나사못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퍼 컴퓨터 첨단 신세품이라도 값싼 부품이 필요합니다. 작은 부품이 없으면 고장을 일으킵니다. 비싸고 안 비싸고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라는과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제품이 있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성공이 아니라 필요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화려한 모래성이 아니라 투박한 벽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모래성은 금방 지을 수 있고 얼마든지 멋을 부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벽돌성은 더뎌보이지만, 하나하나가 쌓이면 튼튼하고 오래가는 건물이 됩니다. 우리가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방향이 올바르면 한걸음을 가도 전진이지만, 방향이 어긋나면 만걸음을 가도 헛수고입니다.

2.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이 어렵고 막막하더라도,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2절에서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3.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결론. 광야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2019.04.21_부활의 증거

2019년 04월 2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저는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부활절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진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믿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믿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데, 다들 그랬다니까 믿는 척하거나 하니면 그러려니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 신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와 부활의 증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부활의 증거 1

–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첫번째 증거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입니다.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충성스럽고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와 좌절,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현대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니 가늘게라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질적인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뛰어난 교주가 특별한 가르침과 기이한 기적을 행해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죽었습니다. 교주가 마련한 기반 위에 뛰어난 후계자들이 세력을 키워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물론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로마의 사형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할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사형수를 믿는 종교일 뿐입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최후가 비참합니다. 그런 분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한가지 가능성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거짓말로 모의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독교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맞섰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멸절하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다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10대 박해로 정리합니다. 1대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AD 54~68년)에서부터 10대 박해인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AD 284~305년)까지 250년 이상을 박해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이보다 심한 박해를 이토록 오랫동안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콜로세움 아기 한 사형수를 믿는 종교가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종교가 로마 제국이 멸절하려던 종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불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천년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증거 2

– 성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언은 구약의 족장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조와 함께 잔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깨어날 것을 암시하는 부활의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무덤)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충분한 증거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17:22)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32~36)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던져졌던 시체가 살아났던 사례도 있다.(왕하13:20~21) 단순히 예언만했다면 어쩌다가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나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라고 말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리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점말입니다. 부활을 하나의 독립된 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연속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기록이 이 연속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 필연성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거나 실제로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 오셔야만하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고 죽으셔야만 하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연속적인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거 3- 교회

예수님 부활의 세번째 증거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을 정보습득, 지적동의, 자기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인다거나 존재를 확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사탄은 더 잘 인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심겨진 감사와 감격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한가지 방법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의 인격적인 만남은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받으심,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각성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것을 의미하지만, 그 전에 자기자신을 보는 자기성찰력이 생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다

증인은 증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9.03.10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9년 03월 10년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4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같은 예루살렘의 주류 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진실한 삶 때문에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받은 존경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평판과 명성 혹은 직책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했기 때문에 얻어진 밑으로부터의 존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례 요한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혼란에 빠졌을까요? 이유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면 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을 심판하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3:7~12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 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뜨거운 열정과 불같은 성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빨리 심판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면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군사적인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당연히 로마군대를 패퇴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후에 타락한 제사장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패퇴시키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이 많습니다.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메시아의 초리시 사역과 재림시 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처음 오셨을 때는 구원을 가져오시고, 두번째 오실 때는 심판을 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성경을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편견을 가지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는,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행할 사역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일을 예수님은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맞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변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엉뚱한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변호입니다. 한때 세례 요한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는 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칭송하던 말이 가시돋힌 비난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기억해 주십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던 시절의 세례 요한을 추억하신 것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거부했고, 왕궁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인생을 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서 변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최후에 변론해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알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헤롯을 추종하거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헤롯을 메시아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가 대립할 때 외교적인 감각을 가지고 로마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힘을 추종하던 사람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찬 가르침을 가르쳤지만, 엄격해 보이는 모습이 호감을 주었습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세례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라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실패했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를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례 요한을 붙드는 굳건한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용서받고 스스로 구원 받는 셀프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주의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탄원이고 요청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합니다.

R.C. 스프롤도 구원의 확신이 유익하지만, 구원의 확신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의 구원, 즉, 그 전후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후쿠마의 가르침은 저의 오랜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처럼 위선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거룩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강조하지만 셀프 구원이라는 인본주의를 강화할 뿐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면서 입에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류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또한 불의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를 추구함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헌신과 그들이 변심할지라도 그들의 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언제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께 매혹되는 것이고 매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8.12.25_[성탄절] 거룩한 낭비

2018.12.25 성탄절

본문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

공짜

박호현(초등학생)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가시는 것 공짜

말- 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는 보는 것 공짜

나이 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초등학생 시 “공짜”.jpg 사진

2018.11.11_예수님, 베드로를 만나주시다

2018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5:1~11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0. 만남

만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는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톤레사프’는 캄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여인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지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몬순이 닥치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서 집이며 세간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죠. 그러면 사람들은 공동으로 뗏목을 만들어서 몇 집이 함께 살아요.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서 뗏목이 모습을 보이고,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죠. 바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저는 해마다 6개월 동안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옆집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표정이군요. 하지만 이웃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대방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앞서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새학기가 되면 기대에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하고 말입니다. 반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합니다. 기성 세대는 워낙에 힘들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남이 기쁠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만남에 관해 기대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만남이 기피해야 할 일이 된 이유는 만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면 만남도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그래서 그의 삶이 기쁨과 기대로 가득차게 되었을까요?

1. 다가오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본문과 병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자 마자 모든 것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간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연계해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은밀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온 줄로 오해할 정도로 말입니다. 신앙이 내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 좁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혹독한 고문을 당해서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지만, 고문이 너무 심해서 신앙을 부인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매우 편안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실제로는 믿음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비합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니까 사람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쿠마는 좁은 의미의 구원 그러니까 구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전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잘난체하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반대로 한편으로는 깊은 안도감을 줍니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기댈 곳이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지구는 멈춰있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구는 멈춰있고, 해가 도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도는 것은 해가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주변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신중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됩니다.

2. 부르시는 예수님

다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결단의 계기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결단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결단할만한 근거도 주십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입니다. 그냥 놔두면 우리는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때는 속삭이시고, 기분이 안좋을 때는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고통중에 있을 때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적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번에 헌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무죄 판결 난 것이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다.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확실한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확실한 체험일까요?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체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 체험입니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사역은 죄의 각성 사역,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도록 조명하시는 사역,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보통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양심이 악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한 양심의 자연적 작용으로도 때로는 통렬한 후회와 자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오직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안이 열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 (고후 3:18) 나타납니다.

깊은 곳은 외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내면을 비추고 그 빛을 통해서 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 깊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잘 살게 해 주어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성을 깨달았을 때 감격하게 됩니다.

신문 기사에서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들은 댓글 한 줄 썼지만, 내 딸은 목숨을 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댓글 때문에 삶을 마감한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댓글 한 줄도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악도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불씨를 보아야 하고 그 비극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인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지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악이 있는 이상, 이 세상에는 비극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악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으면 어디나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퍼하고 붙들고 씨름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감격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망을 체험해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조명됩니다.

3. 만나주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세 번째이유는 베드로에게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말씀 잘 듣고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본문과 같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건 기적을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데 머물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신을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빛이 비치면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만나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됨을 보게 됩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체험한 일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 하늘나라 재판정에 불리워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더니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전에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우리도 동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이익 단체나 사교 장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그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염려할 필요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자신이 선택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출처] 장영학,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자기를 보는 것은 가장 높은 정신적 단계입니다. 하지만, 신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베드로는 이런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경황 없는 중에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다시피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아 와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에 이끌려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서 믿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셨고, 깊은 곳으로 가자고 권유하셨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러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예배 장소 이전 안내

평택남부교회는 2018년 11월 4일(주일)부터 예배 장소를 변경합니다.
착오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변경 전] 평택 뉴코아아울렛

[변경 후] 두란노교회

(우편번호 17820)
새주소: 평택시 고덕면 고덕로 33
옛주소: 평택시 고덕면 해창리 211-2

*현재 교회 간판이 없습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2018.10.28_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2018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고리로전서 3:6~11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한줄 요약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성장하게 도우십니다.

개요

10월 마지막 주간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10월을 보내면서 가지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저 같은 세대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생각할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할로윈데이를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 풍습이라서 동참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또래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무조건 막기도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10월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생각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종교개혁입니다. 중세 교회가 끝없는 타락에 빠졌을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마틴 루터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마무리 지은 사람은 존 칼빈입니다.

왜 하나님은 존 칼빈에게 종교 개혁을 마무리 짓게 하셨을까요?

0. 칼빈이 종교 개혁을 마무리한 이유

칼빈은 우상화의 위험이 적은 사람입니다. 루터파를 만든 루터나 감리교를 만든 웨슬리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칼빈은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주도하기 보다는 도와주었고, 리더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536년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한 이후입니다. 이 일도 망설이는 칼빈을 기욤 파렐이라는 사람이 칼빈을 강력하게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칼빈은 후에 당시 일을 이렇게 썼습니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출처, 칼빈의 시편 주석 서문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리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칼빈은 인물 자체로 유명하기보다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통해서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성경을 체계화한 책으로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를 잘 세운 사람입니다.

칼빈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화의 위험성이 적은 사람입니다. 저는 칼빈의 이런 점이 종교개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우상화의 위험

사람에게는 우상화의 경향이 있습니다. 우상화는 일종의 투사입니다. 영어로는 프로젝션입니다. 프로젝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여기 벽에 나오는 화면은 사실을 벽에 쓰여진 게 아니라 노트북에 있는 것입니다. 노트북에 있는 화면을 벽에 쏜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를 고치려면 벽에서 고쳐서는 안되고 노트북에서을 고쳐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의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 의사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잘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자기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의사는 나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마음을 엉뚱한 사람에게 덮어씌운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 이미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까 말씀대로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무턱대로 존경합니다. 우상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 칼빈같은 사람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장로교인은 칼빈을 무슨 우상처럼 존경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성경을 해석한 방법을 존중하고 그 방법을 따라 할 뿐입니다.

2. 아볼로, 바울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형의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빠와 엄마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는 스승도 필요하지만, 신중하고 세심한 스승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고, 아볼로는 신중하고 학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제자 중에서 디모데는 몸이 약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속에서 우상화하고 싶은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 섬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바꾸기 원하십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슈퍼맨처럼 힘에 쎈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아빠가 배나온 아저씨에 불과하고, 모르는 것이 많고,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어른에 됩니다. 좋은 아빠는 이 과정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4살 때,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5살 때, 아빠는 많은 걸 알고 계셨다.
6살 때, 아빠는 다른 애들의 아빠보다 똑똑하셨다.
8살 때, 아빠가 모든 걸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10살 때, 아빠가 어렸을 때는 지금과 확실히 많은 게 달랐다.
12살 때, 아빠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빠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엔 너무 늙으셨다.
14살 때, 아빠에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아빤 너무 구식이거든!
21살 때, 우리 아빠 말이야?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쳐졌지.
25살 때, 아빠는 그것에 대해 의외로 좀 알고 계시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내놓으신다. 뭐 오랫동안 그 일에 경험을 쌓아 오셨으니까 그 정도쯤은 아시는 거겠지만.
30살 때, 아마도 아버지의 의견을 물어보는것도 큰 도움이 될것 같다. 아버진 경험이 많으시니까.
35살 때, 아버지께 여쭙기 전에는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40살 때,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버진 그만큼 현명하고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
50살 때,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이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었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출처, 앤 랜더스

정신적인 성장과정도 비슷합니다. 우상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우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오해하고 착각 속에 살게 됩니다.

어머닌 장에 가실 때마다 나를 교실에 맡기셨는데 학교가 세상 전부인 교사의 아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전능한 신이었다. 이모가 결혼을 하자 고급공무원에다 부자인 이모부는 나의 전능하신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경쟁 관계가 되었다. 그해 여름 이모 가족과 우리는 시골 별장을 빌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떠났다. 드디어 휴가의 클라이막스인 사냥, 최신식 엽총을 꺼내는 이모부 앞에서 아버지가 낡은 화승총을 꺼내면서부터 모든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인 아버지는 한마디도 못하고 이모부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고. 아버지와 이모부 몰래 따라간 사냥에서 나는 아버지의 처참한 패배를 몇 번씩이나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해 여름 신처럼 전능하게만 여겨지던 아빠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고 아빠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출처, 영화 마르셀의 여름

약점이 많은 인간임을 알고, 그것마처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고집스럽게 단점과 연약한 점을 외면합니다. 우상화된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을 내세웁니다.

참된 스승은 제자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 줍니다. 보스는 부하가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스승이 되어야지 보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3.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스승을 보내고 그 스승을 통해서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로써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1년 이상 변덕부리지 말고 꾸준하게 예배했으면 합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심지가 견고하게 지냅시다.

정신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남야 합니다.

미국의 쿠바 침공작전의 실패는 생각이 같은 사람의 오류를 알려줍니다.

집단사고의 대표적인 예는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사건을 들 수 있다. 케네디 정권은 당시 쿠바에 위협을 느껴 카스트로 정권을 없앨 궁리를 했다. 핵심참모들이 논의한 끝에 미국으로 망명한 반(反) 카스트로 쿠바인들을 훈련시킨 후 피그스 만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냈다. 또한 실패를 하더라도 쿠바의 내부 봉기를 일으킬 수 있을테니 케네디 행정부의 참모들은 이것은 꽃놀이패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 그 자체였다. 일단 침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3일 만에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0명이 생포되었다. 그러면 쿠바의 내부 봉기는? 봉기는커녕 카스트로 정권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고 쿠바는 미국에게 내정간섭이라고 몰아부치며 포로교환의 조건으로 배상을 청구했다. 그리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1961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용인 5,300만 달러를 배상했다. 무엇보다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미국은 멍청한 짓을 했다는 비아냥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글로벌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케네디 정권의 참모진은 하버드대학교 교수, 포드자동차 사장, 록펠러재단 이사장 등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폐쇄된 공간에 모여 논의를 할 때,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사고는 큰 실패를 낳을 수 있는 잠재된 핵폭탄과 같다. 실제로 미국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당시 쿠바를 지원하던 소련과 핵전쟁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출처, 고영성의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있으면 아무리 엘리트를 모았더라도 오류에 빠지고 실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단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설립하고 아볼로가 대를 이어서 목회를 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두 사람의 성향이 다른 것을 하나님도 아셨습니다. 그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리더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우상화하거나 숭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도 약점이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섭리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 찬양과경배
425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2018w43_온통 가을로 둘러싸여 예배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기도 듣기

은혜의 하나님,
가을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산을 넘고 가로수를 적시고 앞마당까지 물들였습니다. 저희는 온통 가을로 둘러싸여 주님의 섭리를 찬양하며 예배합니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지만, 태풍이 큰 위력이 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풍 ‘위투’로 인해서 사이판이 큰 피해를 입었고, 우리나라 관광객 1,800명도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태풍이 아직까지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유래 없는 이상 고온이 태풍에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입니다. 시계 부품처럼 정교한 세상이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겸손함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지혜보다 우월하고, 하나님 만드신 자연은 인간의 과학보다 아름답습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기 원합니다.

경배와찬양 : 493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사랑의 하나님,
이제 세상은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로 인해 자기 유익을 위해 갈등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분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돈보다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고 금보다 소중한 것을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최근 일어난 흉악 범죄로 인해서 국민들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희가 두려워하지 않고 냉철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해답을 찾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인터넷을 통해서 가짜 뉴스, 거짓 소문, 허위 정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을 알기 전에 결론을 내리지 않는 절제를 주시옵소서. 감정에 휘둘려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명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이제 예배 장소를 평택 뉴코아에서 두란노 교회로 변경하려고 합니다. 저희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두 교회가 겸손하게 연합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니 주님 뜻대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83 마음이 상한 자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10.21_노아의 권위

본문

창세기 09:20~27 / 2018년 10월 21일 주일설교

(창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창 9: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한줄 요약

노아는 구원 계시의 전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0. 권위와 권위주의

노아가 술을 먹고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아들 중에서 함은 노아의 실수를 떠벌렸고, 셈은 덮어주었습니다. 이 내용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단순히 목회자의 실수를 떠벌리면 안된다. 혹은 목사를 비판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른 해석은 무엇일까요?

이 내용에서 의문점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셈이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가 자기 방에서 술을 먹고 옷을 벗었는데, 그것이 왜 큰 실수일까요? 함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권위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영향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필요한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1.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첫째, 노아의 실수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고 추측해 보겠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은 속옷을 입고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하체를 보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노아도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왜 하체를 가렸을까요? 당시 가나안 이방 종교에서는 옷을 벗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죄를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할례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또 제사장에게 하체를 가리라는 말씀도 특별히 더 음란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하체를 가리지 않은 것이 실수입니다. 그는 음란한 죄를 범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하체가 놀림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었습니다.

2. 가나안이 저주받은 이유는?

둘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노아가 하체를 벗었어도 함이 그것을 발설하지 않았으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은 그것을 발설했고 노아의 실수는 알려졌습니다.

함의 죄는 계시의 전달자인 노아의 권위를 훼손해서 그가 전하는 말씀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데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다른 건 다 용서해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못하게 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성령 모독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함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예를 보면 명백합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울은 정식으로 기름부음받은 왕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건,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받은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제사장, 왕,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제사장과 동등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할 때 보여준 존중은 함이 노아에게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함이 잘못했는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의 계보로는 이후로 구원 계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 믿음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은 함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3.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셈은 다윗이 사울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한 존중을 노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셈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믿음이 확증된 것입니다.

오늘날 권위가 실종되고 권위주의만 남았습니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없는데 권위가 있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권위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막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권위와 권위주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동일하게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깨끗하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비판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권위는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도록 인도하고 도와주고 만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권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2018w42_단풍은 하나님의 편지같습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소리없이 단풍이 산과 들을 물들이고 도시로 내려와 거리의 가로수마저 물들이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다고 알려주는 하나님의 편지같습니다. 가을 편지같은 단풍을 보며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올해는 이상 고온으로 인해 잠자리를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들판을 날아다니던 고추 잠자리, 된장 잠자리, 밀 잠자리, 장수 잠자리가 그립습니다. 잘못하면 나중엔 잠자리가 사라질지 모릅니다. 옛날에 있었던 곤충으로만 기억될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저희에게 주셨지만, 저희는 자연을 보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세 먼지, 미세 플라스틱, 오존층 파괴, 이상 기온으로 땅, 공기, 바다를 오염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빌려주신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막아 주시옵소서. 풍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지혜보다 우월하고, 하나님 만드신 자연은 인간의 과학보다 아름답습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기 원합니다.

경배와찬양 : 462 하늘을 나는 새도

사랑의 하나님,
이제 세상은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로 인해 자기 유익을 위해 갈등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분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돈보다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고 금보다 소중한 것을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주에는 맘 카페를 통해서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고 그로 인해 상처받아 삶을 마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말이 칼보다 날카롭고, 마음의 상처가 몸의 상처보다 아픈 시대입니다. 말을 조심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기 않기 위해 조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터넷을 통해서 가짜 뉴스, 거짓 소문, 허위 정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을 알기 전에 결론을 내리지 않는 절제를 주시옵소서. 감정에 휘둘려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온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이제 예배 장소를 평택 뉴코아에서 두란노 교회로 변경하려고 합니다. 저희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두 교회가 겸손하게 연합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니 주님 뜻대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185 하늘 위에 주님 밖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10.16_[교리] 예수님의 죽으심

본문

사 53:4~6 / 2018년 10월 14일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한줄 요약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죄를 범한 인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은 대속이었습니다.

개요

프로야구 정기 시즌이 끝났습니다. 플레이오프라고 해서 정규시즌이 끝난 뒤에 1등을 가리는 시합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스포치를 좋아하는 분들, ‘팬’이라고 하는 분들은 스포츠에 매우 몰입을 합니다. 대학 동창 중에 한 명은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했습니다. 그 친구는 타자들의 타율과 투수들의 방어율 같은 기록을 암기하고 다녔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그런 팬의 모습이 놀랍게 보이겠지만 더 심하게 몰입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야구팬 중에는 선수나 감독보다 데이터를 잘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수 중에는 자기 기록은 몰라도 다른 사람의 기록은 잘 모르는 선수도 있습니다. 데이터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 아무리 잘 알고, 각종 기록을 암기하고 있어도 팬은 팬이고 선수는 선수입니다. 결국 기록을 만들고 감동적인 순간을 가져도 주는 사람은 팬이 아니라 선수입니다. 여러분은 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팬이 되고 싶으십니까? 교회에도 선수가 있고, 팬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선수가 될 수도 있고, 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용어로는 선수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팬은 무리라고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데서 그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녀면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경험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0. 복음의 신비

복음의 신비는 사랑과 공의를 둘 다 만족시켰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지 않고 용서하면 불공정한 일이 되고, 죄를 지었다고 벌만 주면 사랑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모순,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점이 신비입니다.

동그라미와 네모를 합칠 수 있을까요? 그냥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원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위에서 보면 원이고, 옆에서 보면 네모입니다. 생각이 넓어져야 신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도 이처럼 생각이 넓어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질고는 병 혹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죽어간다는 증거가 질고입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정신적 , 육체적으로 질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과 사회를 바라볼 때 이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질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질고는 형벌을 동반합니다. 질고의 원인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는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인간이 의롭지 못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 생명을 이어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도 질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과 정신에 질고가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부패했습니다. 다른 말로 비정상적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에 질고가 있기 때문에 슬픔이 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모두 질고에 원인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영혼이 아파서입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자녀, 형제자매, 직장 동료, 주변 사람들이 아픔을 줍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2. 그가 찔림은

우리 삶의 질고와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불경건의 대가를 치러야 불경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대속의 삶이셨습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죄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각성이 일어나기는 힘듭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이 시작됩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알려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용, 장영학 –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여러 경험이 축적되고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양한 관점을 접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다. 이것이 자기 통제적 정신이다. 이 단계가 되면 비로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다. 사회적 정신은 모두가 ‘예’ 하면 절대 ‘아니오’ 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적 정신에 이르러야 자신만의 관점을 남들에게 주장할 수 있으며,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남들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단계는 자신의 관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남, 특히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게 된다. 자신만이 옳은 사람이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임원들 중에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에 빠져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분들은 자기 통제적 정신을 가지고 성공했지만 그 성공 경험 때문에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인용 끝]

자기 객관화에 이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는데, 이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장 처음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당연히 오는 단계입니다.

성경을 기가막히게 푼다는 사람 중에 죄의 각성이 있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무리일 뿐입니다. 아직 선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3. 그에게 담당시켜셨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대신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필요하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야구 룰과 선수들의 데이터를 많이 안다고 해서 선수가 아닙니다.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뛰어야 선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직접 살아야 선수입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죄의 각성이 일어나는 데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죽음의 신비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의 각성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우리의 어두운 눈이

2018w41_파란 하늘을 보며 예배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기도 듣기

섭리의 하나님,
물감을 풀은 것처럼 하늘이 파랗습니다. 행복을 꿈꾸던 고향의 하늘입니다. 하늘은 예전과 다르지 않지만, 저희는 점점 자라서 나이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변함없이 순수하게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요즘은 사회와 기업이 모두 일과 쉼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해서는 발전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수 천년 전에 주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셔서 가르치신 진리를 이제야 깨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일과 쉼의 균형 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쉼의 중요함을 깨달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도 깨닫게 하여 주시옵서.

은혜의 하나님,
저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반 만년의 세월을 이어왔다고 내세우지만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던 이 민족, 독립을 유지했다고 자랑하지만 외국의 침공에 수 없이 시달린 이 민족.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제야 번영을 누리게 되었지만 급격하게 타락하고 있는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구약 시대에 남유다를 향해 한 사람의 의인을 찾는다고 말씀하셨던 주님, 이 시대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 나라 이 민족에서 한 명의 의인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462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사랑의 하나님,
이제 사회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합의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 갈등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 안정, 빈부 격차 해소, 청년 실업 완화, 노인 빈곤 해결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인터넷 댓글을 통해서 악성 비난이 발생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비난과 소문이 근절되도록 인터넷 문화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또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상처가 있다면 치료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갖되,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편견을 버리고 사실을 보고 판단하는 냉철함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소문이 퍼져 매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고한 이들에게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185 하늘 위에 주님 밖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10.07_[교리] 예수님의 거룩

본문

눅 4:33~37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한줄 요약

예수님도 하나님처럼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이 땅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났을까요?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거룩이라는 항생제

성경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사람이셨으나 동시에 죄가 없으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천 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의 성육신을 고지했다.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 를 입증해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9:14) “죄를 범하지 아 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 라.”(요일 3:5)
주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이셨다고 주장하나 결코 육신에 속한 존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육욕은 타락의 결과이며 첫 아담은 창조될 때에 결코 육욕적이지 않았다. 그분은 참으로 사람이었지만 죄는 없으셨다.

 

발가락이 까져서 오래된 밴드를 붙이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얇게 딱지는 생겼는데 무척 간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소독약을 찾아서 소독을 했더니 거품이 나면서 몹시 아팠습니다. 다음 날 다시 소독을 했더니 간지럽지 않고 낫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조금 까진 상처 때문에 오랫 동안 고생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나 노약자들은 어이없이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항생제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병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도 그 병균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고생한 것입니다. 다행히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몸이 이겨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변균이 강하면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 때문에 인구의 30~50%가 죽었다고 합니다. 숫자로는 7,500만 명에서 2억 명 정도라고 하니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오랫동안 큰 피해를 겪었습니다. 아이들이 오래 살지 못할까 봐 이름을 짓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전염병에 약하기 때문에 아이를 잃었을 때 슬픔을 줄이려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염병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이유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푸른 곰팡이가 병균을 죽이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인류는 몸 속에 침투한 병균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고 전염병을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몸 밖 상처에 있는 병균을 죽이는 약을 소독약이라고 하고, 몸 안에 침투한 병균을 죽이는 약을 항생제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병균이 침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의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떤 부분이 병을 죽이는 항생제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마음의 병균 : 더러운 영

성경은 영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영, 다른 말로 귀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병균이 몸에 침투하면 열이 나거나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거나 하는 증상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병균이 침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 마음에 침투하면 어떤 증상이 일어날까요?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더러워진다’라고 말입니다.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요즘에는 상처가 나면 가장 먼저 소독을 합니다. 소독만 잘해도 상처가 덧나지 않습니다. 소독을 안하면 상처가 덧나고 곯마서 나중에는 그 부위가 썩어들어갑니다. 소독은 더러운 균을 죽이는 것입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을 썩게하는 균입니다.

영도 더러운 영이란 건, 우리 마음을 썩게하고 부패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영이란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중독입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마음입니다. 여기에 더러운 영이 침입하면, 중독이 됩니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같이 마음이 중독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하는 마음도 필요한 마음입니다. 나쁜 사람, 나쁜 일을 미워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악한 영이 침투하면 미움이 자기를 파괴하고 남도 파괴합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의 건강한 세포를 곯게 해서 파괴합니다. 더러운 영도 우리 마음의 건강한 감정을 곯마서 파괴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더러운 영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롬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말씀 앞에 두 가지 더러운 행동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성애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악한 영의 영향입니다. 악한 영은 보이지 않고, 통증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사람의 인생과 사회에 비극을 일으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더러운 영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마음의 항생제 : 거룩

마음에 항생제를 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항생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입니다.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악한 영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병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독약입니다. 항생제입니다.

어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빛이 입니다. 어둠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대포를 쏘아도 끄덕 없습니다. 잠시 총이나 대포가 반짝하는 동안 주춤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빛이 없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소독약, 항생제는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어떤 능력 있다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안 나가면 귀신한테 엄청 욕을 한답니다. 그러면 나간데요. 제가 놀란 이유는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해서 답답합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입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상처가 생겼는데 소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천으로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상태가 안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귀신이 나가는 척 해주는 것이지 나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입니다. 거룩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거룩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 앞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 하나님의 인내는 거룩한 인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에 말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사도들을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했기 때문에 동일하게 말로 악한 영을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악한 영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가장 강력한 항생제이고 가장 강한 능력입니다. 가장 강한 귀신도 거룩한 사랑에는 견디지 못합니다.

안이숙 사모님의 죽으면 죽으리라에 보면, 감옥에서 미친 만주 여자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주의 가난한 집에서 감자 한 부대에 팔려 10살 때에 중국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가 어떤 총각과 눈이 맞아 함께 공모하여 남편을 토막 내어 죽이고 도망치다 잡혀온 것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왔는데 쇠고랑에 묶여 고문을 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옷도 더러고 몸에서 악취가 나서 사람들이 접근을 안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안했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이 그 여인이 불쌍해서 자기 밥을 주고 꽁꽁 얼은 더러운 발을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나니까 이 여인이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오랜 기간 진심의 정성과 하나님의 사랑은 92번 그녀의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깊은 고민에 잠기어 그녀는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머리를 잡아 뜯고 가슴을 때리며 통회하고 있었다. 92번 그 모질고 악한 살인범이었던 그녀가 마치 무슨 아름다운 초상화 같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이숙 여사를 통하여 그녀는 예수님을 보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는 뒤에 늘어지고 맑고 흰 얼굴에는 수심이 끼고 그 눈은 애원하는 불안의 눈이었지만 그렇게도 아름답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92번의 사형집행일이 다가왔다.
“92번 나와!”
“아휴 어떻게 어떡하니 어떻게… 선생님 나 무서워요. 나 죽는 게 무서워요. 나 살려 주세요. 나 살려 주세요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예수님이 널 사랑하셔. 언제나 네 옆에 계실거야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예수님께 부탁해서 저를 꼭 남편 있는 곳에 가게 해 주세요. 가서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싶어요.”
“예수님이 항상 너를 인도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뵐게요.”

3. 치료의 결과 : 상하지 않음

항생제를 바르게 사용하면 건강해집니다. 예수님의 치료도 귀신들린 사람을 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회복시켰습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건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잠잠하도록 하셨습니다. 귀신과 대화하거나 물어보면 안됩니다. 마가복음에 대화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윽박지르고 소리 높이는 등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마음에 거룩한 사랑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식으로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깊이 회개했을 때 제 머리가 맑아지고 감정이 변화되고 몸의 경직이 풀렸습니다. 몸에 실질적인 회복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 마땅한 존재라는 깨달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깨달아졌을 때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청교도가 그렇게 주장한 일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룩한 영은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긴가민가하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상처 없이 온전하게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본 받아 행할 때 동일하게 온전한 회복을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병균으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병균은 마음에 침투해서 악한 마음을 같게 하고 악한 행동한 하게 합니다. 양심을 마비시키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병균은 죄입니다. 이 병균은 페스트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이 죄라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없으면 인간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죄를 이길 수 있는 항생제가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항생제를 알고 바르게 사용합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립시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292 내일 일은 난 몰라요

2018w40_단풍이 시작된 시절에 예배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기도문 듣기

섭리의 하나님,
늦은 태풍이 몰고 온 가을비가 시월의 시작을 축하했습니다. 비가 그치면 북쪽에서 시작된 단풍이 산을 더 붉게 물들여 갈 것입니다. 단풍이 시작된 시절에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 본 벼가 유난히 노랬습니다. 그것은 백 년만에 찾아 온 더위를 이겨낸 기쁨처럼 보였습니다. 특별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그리스도인에게 벼들의 인내를 내려 주시옵소서. 동일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홍수가 나면, 오염된 물은 많으나 맑은 물은 적어져 고통한다고 들었습니다. 정보로 홍수 난 이 시대에 동일한 고통이 저희에게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전한 가르침을 발견하고 분별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예리한 지성과 거룩한 겸손, 확신에 찬 능력으로 제자들을 이끄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희를 채우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영이 저희를 진리와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경배와찬양 : 417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사랑의 하나님,
뒤늦은 가을 태풍으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농작물이 떨어져 추수하지 못한 농부, 비와 바람으로 집이 파손된 사람, 배수구가 막혀 침수피해를 입은 주민 등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과 손길을 보내주시옵소서.

자영업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경기가 침체되고 경쟁이 심화되어 어려움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여 전반적인 매출이 늘어나게 하시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돌파구를 찾게 하시옵소서. 더불어 부분별한 출점을 자제하여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인터넷 비난 댓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왕따가 청소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가해 학생들에게는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공감 능력을 넣어주시고, 내면에 잠들어 있는 선한 양심을 일깨워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소문이 퍼져 매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고한 이들에게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29 내 감은 눈 안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9.30_[교리]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

본문

(요일 4:1~3)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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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한줄 요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예수님이 교리의 핵심

오래된 베스트셀러 중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습니다. 맨 앞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는 첫날부터 이해하기 쉬운 말로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운다. 선생님은 ‘간단한 규칙’이라며 가르쳐주지만, 사실 이것들은 인간이 힘겹게 싸워 얻어낸, 온갖 시험을 거친 인간 행위의 규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은 규칙을 배운 뒤, 곧 실습을 하게 된다. 학교가 매일 배운 것을 연습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교리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간단하게 배우는 교리가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매우 힘들게 발견하고 지켜온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배운 것만 잘 기억해도 좋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탓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탓하고 싶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지 모릅니다.

이 책에는 죽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목사로 일하던 시절,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하면 늘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 병원에 다녀왔는데, 의사가 저더러 시한부 인생이랍니다.”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뭐라고요? 그걸 몰랐습니까? 나이도 적지 않은데 그 말을 들으려고 의사한테 돈까지 냈단 말입니까? 유치원에서 작은 컵에 솜과 물과 씨앗을 담아놓고 기다리던 때에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컵 속에서 생명이 태어난 것은 기억합니까?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돋았지요.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식물은 죽었어요. 죽었단 말입니다. 삶은 짧습니다. 그날 자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파서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었나요?” 끝내 그렇게 말은 못하고 생각만 했다.

정말 중요한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면할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과 그 사실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1. 영을 다 믿지 말라

먼저, 성경에서는 신앙적인 영역에도 속이는 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의하라는 얘기입니다. 영적 사기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는 진실한 사람이고, 절대 사기꾼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맹세하라면 맹세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상담한 분 중에는 신천지에게 성경 공부를 배웠는데, 그 사람이 절대 신천지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혈서까지 쓰겠다고 장담했는데, 결국 신천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선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귀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즉, 그 거짓 선지자도 속고 있는 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자기 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내가 보고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했답니다. 거기서 예배드리고 애기를 나누어 보니까 수원 교도소에 억울한 사람만 있지 죄인은 하나도 없는 것 같더랍니다. 재판정에 가면 모두 자기는 선한 사람이고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재판관이 그런 사람 주장을 믿고 재판하면 엉터리 재판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주장만을 믿으면 안되고 드러난 증거과 증인의 증언, 사겅의 정황을 두루 살펴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 재판장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결국 내가 분별하고 내가 그 분별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속았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너무 헷갈립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비신앙인들이 큰 도움을 줍니다.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뉴스 탐사 프로그램에서 알려줍니다. 비신앙인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볼 때 상식 이하라고 생각되는 신앙인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세상 뉴스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을 비판하는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아. 정직하게 장사하면 돈을 어떻게 벌어.”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융통성이 없어 뇌물을 안 주면 사업을 어떻게 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을 받는다고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교회다니는데 나보다 더 썩었어. 사기꾼이야”라거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공사 대금을 주지를 않아.”라는 비판을 받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양심이 살아납니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의 기준이 비신앙이보다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장갑을 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과 장갑을 안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자유롭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비양심이라는 장갑을 벗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담대하게 죄악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한 때,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의 다음과 같은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도 있고, 일부를 영원히 속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링컨)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당대에 대단한 인기와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대의 평판과 명성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

이단 중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단과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영이라는 이단입니다. 정통 교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가 살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영은 고귀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주장입니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체를 갖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육신과 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은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the sinful nature, 즉 죄악된 본성입니다. 헬라어로는 ‘사르크스’라고 해서 몸을 가리키는 ‘소마’와 다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도박에 중독된 사람을 도박하지 못하게 하려고 손을 자르면 어떻게 될까요? 도박을 안할까요? 영화에서 보니까 손에 갈고리를 끼고도 도박을 하더라구요. 손이 무슨 잘못입니까? 마음이 잘못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육신은 오염된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오염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죄를 괴로워하는 감각이 무뎌진 마음이 육신입니다.

가끔 보면, 귀신을 쫓아 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온전하게 거룩하셨습니다. 육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 중립적입니다. 몸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제한된 육체에 갇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구더기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더기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지에 파송된 선교사들 혹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많이 묵상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고 합니다.

3. 예수를 시인하자. 삶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외치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믿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구호가 안 통하게 되었습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처음 언급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학장이 마지막에 당혹스러운 말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네.” “네?”

“걱정 말게. 인내심을 가져. 시간이 지나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될 걸세. 눈을 뜨고 살게. 판단은 유보해. 쓸모 있은 사람이 되게.”

이 책의 저자는 목회자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아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는 핵심 습관이 있습니다. 핵심 습관이란 용어는 제가 고영성 작가의 ‘처음에 누구나 걷지도 못했다’에서 보았습니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2010년 KBS에서 신년기획으로 ‘습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습관에 대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안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제보를 받아 이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그 잘못된 습관을 교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20세 대학생이었던 ‘김△리’ 씨는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김씨의 잘못된 습관은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깔끔한 외모와 20세 여대생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방은 너무 지저분했죠. 스타킹, 잠옷 등 일주일 동안 입었던 옷들 이 침대 위에 널 부러져 있었고, 책상은 폭탄을 맞은 듯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쓰러져 있어 공부하고 책 읽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쁜 습관을 프로그램에참가한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그 결과 방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해졌고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그런데 김씨가 제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았던 이유는 단순히 잘못된 습관을 고친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계획을 세우면 모두 실패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목표를 세우면 행동에 변화를 주어 이룰 수 있겠다’, ‘스스로 많이 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다른 습관도 고쳐지는 파급 효과가 큰 습관을 가리켜서 ‘핵심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핵심 습관’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자기 성찰’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핵심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이유는 육체로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