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개요

창세기 14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한다.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내용은 단순한데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설교하기 좋은 장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전투에서 승리했고, 십일조까지 드렸다고 하니 얼마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설교하기에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설교하기 좋은 내용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할까?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서 말한대로 아브람의 일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믿음의 승리, 십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겪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건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다행히 아브람은 납치당했던 조카 롯을 무사히 구출했다. 조카가 납치당하는 일을 겪는 것도 흔하지 않겠지만, 무사히 구출하는 것은 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다는 건 곧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창세기 14장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잃은 해석이 된다. 14장은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다른 장과 연결이 안된다. 체계 없는 파편적인 해석이 된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은 교회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잘 다니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돈 문제, 집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계속 몰려온다. 교회 잘 안다녀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기도 많이하고, 예배 잘 참석하고, 전도하고, 방언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들부터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교인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때문에 교인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이런 비현실적인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세기 14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내용에서 보편성을 찾는다면 그건 무엇일까? 답을 말하겠다. 환난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환난을 피할 수 없다. 환난은 믿음이 좋거나 안좋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교회를 잘 나가거나 잘 안나가거나 상관 없이 모두에게 닥쳐온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환난을 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14장을 살펴보자.

요절 1. 창세기 14:16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의 조카 롯은 소돔에 살았다. 소돔처럼 풍요로운 지역은 탐내는 세력들이 있다. 세력들 간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분쟁 중에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브람은 이런 분쟁이 생길 걸 미리 예상했던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병사 318명을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멋지게 롯을 구출했다.

간략하게 기록해서 그렇지 아브람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소돔 지역에서 분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을 것이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내려 앉았을 것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뒤쫓을 때는 초조하고 긴장되었을 것이다. 기습해서 적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출했을 때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건 단순히 믿음으로 성공하는 내용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그걸 믿음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 내용은 인생의 환난에 관한 것이고, 환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을 예상했고 대비했다. 그래서 환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기독교 작가인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이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33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환난을 안 당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다. 단, 환난을 당하면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담대하라고 하셨다. 교회 잘 다니면 환난을 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그 생각을 버려라. 내가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안해서 전도를 안해서 봉사를 안해서 이런 환난이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라. 비성경적이고, 불필요하고, 어리석고, 틀린 생각을 버려라.

앞서 말한 스캇 펙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한국교회 교인들의 삶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거꾸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자기 배를 불리려고 성경을 왜곡한다. 쓸데 없이 죄책감을 일으킨다. 죄책감은 죄의 각성과 다르다. 죄책감은 바깥에서 찌르는 것이고, 죄의 각성은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죄책감은 파괴적이고 죄의 각성은 건설적이다. 죄책감은 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환난이란 건 개인의 믿음의 정도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문제이다. 이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어떤 모양으로든 찾아올 수 있다. 아브람처럼 환난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요절 2. 창세기 14:18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은 적을 물리치고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7:3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한마디로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한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비중있는 배우가 다른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걸 까메오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까메오로 출연한 것이다. 아브람은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아브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근거는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6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또 만나게 된다. 그건 다시 설명하겠다. 안타까운 건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십일조에 맞춰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중요한 건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 보자. 아브람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롯을 무사히 구출해도 돌아왔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분을 만났다.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말이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승리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드리고 싶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전체를 드렸다는 의미가 된다.

왜 예수님은 여기에 나타나셨을까? 환난 가운데 함께 하고 돕기 위해서이다.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스포츠 경기장에 관중이 들어찬 것과 같다.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응원하는 관중이 기다리는 것과 같다.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의미이다.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그만큼 환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눈물 흘리게 한다. 예수님이 여기서 깜짝 등장하신 이유는 그만큼 이 과정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망을 갖자. 뜻밖의 동행,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환난은 왜 찾아 올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성경에서 환난은 에덴동산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인생에서 환난은 필수과목이다. 너무나 큰 환난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환난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환난이 필수라는 말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많은 경우, 환난이 나를 성장시켜준다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성장하게 되면, 환난은 일종의 수업료가 된다. 좋은 수업은 수업료가 비싸다. 배움이 크면 수업료가 아깝지 않듯이 크게 성장하면 환난도 아프지 않게 된다.

환난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환난을 가장 잘 극복하는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것은 환난 중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이걸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 요한계시록 7:14이다.

요한계시록 7:14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큰 환난’은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큰 환난’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종말에 있을 ‘대환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대환난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그 큰 환난’을 ‘인생’이라고 해석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큰 환난’이다. 인생이라는 큰 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바란다.

정리

창세기 14장의 주제는 “믿음이 좋으면 형통한다, 십일조 잘내자”가 아니다. “인생에는 환난이 있다”가 주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이 찾아올 걸 알고 대비했다. 미리 훈련시킨 병사를 데리고 조카 롯을 구출했다. 인생에 환난이 반드시 있고, 그걸 대비하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바른 태도이다. 환난은 신앙의 정도와 상관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대비하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으로 등장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감사드렸다. 환난은 큰 고통을 주지만, 환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면 그를 도우신다.

적용

누구나 평온하고 형통한 인생을 원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환난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다. 환난은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코스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수도 있다. 두려워서 피하려고 싶다. 신앙생활 잘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환난은 에덴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점이다. 피해갈 수 없다.

환난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환난 당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라. 환난에 맞설 때 예수님이 도우신다. 환난 가운데 예수님이 깜짝 등장하신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응원하기 위해서. 환난 가운데 소망을 갖자.

창세기 13장 | 헤어짐과 만남 | 방향을 정하면 동행이 생긴다

개요

창세기 13장 강의하겠다. 아브람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의해야할 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보면서 제대로된 해석을 못한다. 제대로된 해석을 못하니까 억지로 해석하거나 자기마음대로 해석한다. 잠시 영상을 멈추고 창세기 13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구나로 해석되는가 아니면 이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해석되는가?

아브람에 관한 기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다. 아브람 개인의 경험이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12장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을 겪었다.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윗도 블레셋으로 망명했다. 이것은 배교에 해당하는 심각한 불의이다.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 이후에 아브람은 어떤 일을 겪을까? 답을 말하겠다. 결별의 단계이다.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고, 멀었던 혹은 몰랐던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나아갈 방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함께 갈 사람과 함께 못갈 사람이 나누어진다.

롯은 아브람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다. 롯와 아브람은 함께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롯과 아브람은 목표가 달랐다. 목적지가 다르면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없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과 광주로 가는 사람이 같은 열차를 타고 갈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함께 가다가도 갈라서야 할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 이것은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반드시 겪어야 할 단계이다.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는 목적지가 어딘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요절 1. 창세기 13:9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앞장의 내용을 잠시 돌이켜보자.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바로에게 빼앗겼다. 자신이 지레 겁을 먹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핑계댈 사정도,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이 바로의 꿈에 나타나 경고했기에 아내를 되찾고 보상금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아브람이 치사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누구나 치사하고 나약해질 때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중요한 건 자기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구도자가 이 과정을 거친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의 예들 들었다. 이번 시간에는 레위기를 예로 들겠다. 레위기에서는 독특하게도 나병에 관한 규례가 자세하게 소개된다. 나병은 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병이다. 신경세포가 마비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손가락이 잘려도 아프지 않다. 등에 불이 붙어도 태연하게 걸을 수 있다. 나병은 불의한 인간의 상태를 비유이다. 인간은 당연히 해야할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한다. 불의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해도 태연하다.

레위기에서는 피부에 반점에 생기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제사장은 시간을 두고 상태를 살펴야 한다. 반점이 퍼지면 환자를 부정하다고 판정한다. 그런데, 놀라운 규정이 있다. 반점이 온몸에 퍼지면 정하다고 판정해야 한다.

레위기 13: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의하다는 것을 알면 정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이걸 이렇게 표현하셨다.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임을 알아야 복음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자기 불의를 발견한 사람은 의를 찾게 된다. 영양이 결핍되면 몸이 필요한 음식을 찾는다. 내 안에 의가 없기 때문에 바깥에서 의를 찾는 것이다. 영혼이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찾는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 오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게 된다.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투었다. 롯과 아브람의 마음이 멀어진 결과이다. 근본 원인은 롯과 아브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롯은 번영을 추구했고,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추구했다. 이것은 롯이 선택한 땅을 보면 알 수 있다. 롯은 소돔을 선택했다. 이것으로 왜 롯과 아브람이 헤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했다면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하기를 기도하자.

요절 2. 창세기 13:16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타국으로 떠날 때 함께했고 외로울 때 의지했던 조카가 떠났다. 쓸쓸하고 힘이 빠질 상황이다. 하나님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위로하신다. 조카와 힘을 합쳐야 자손이 번창하기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 생각은 달랐다. 단순히 육신의 자손이 복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육신의 자손도 복을 받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자손이라는 말씀은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앞으로 자손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둘째, 육신적인 자손과 그들이 받을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복을 받아야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아브람 한 사람에서 비롯한 아브람 가문은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를 세우게 된다. 셋째, 영적인 자손과 복을 가리킨다. 물질적인 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려는 궁극적인 복이 아니다. 진정한 복, 영원한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복을 아브람처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자손에 관한 설명은 15장에서 다시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겠다.

한 가지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미 여러차례 설명한 요약적 서술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브람이 믿음을 가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이 순식간에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요약적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매우 긴 시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해서 서술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2을 보자.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은 요약적으로 서술된 구절이다. 왜냐하면,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구원을 주신 사건을 짧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요약해서 서술했으니까 풀어서 보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걸 반대로 해석한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구원받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한다.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만하면 구원받는다는 황당한 교리를 만든다.

창세기 12장부터 기록된 아브람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개입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이걸 알고 성경을 보자.

정리

창세기 12장부터는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단계를 알려준다. 12장에서는 불의가 폭로되었고, 13장에서는 결별이 찾아왔다.

현대 용어로 설명하면 이렇다. 아브람은 교회를 다녔고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경 공부도 했고, 기도 생활도 하고, 예배도 잘 드렸지만,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용기를 내서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출발한다면 말이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헤어짐과 만남이 시작된다.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새롭게 동행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나님은 자손이라는 말로 아브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오래 알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알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 헤어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도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같은 사람과의 만남은 알고 지낸 시간과 상관 없이 즐겁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다. 새로운 만남과 관계를 기대하도록 소망을 주신다.

적용

죽고싶을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연락처를 싹 지워보시라. 죽고싶을만큼 힘든데 아무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오래알고 지냈다고 친구가 아니다. 알게 된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친구이다.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나면 어색할 때가 있다. 대화가 겉돌고 마음을 나눌 수 없다. 대화를 계속할수록 좋았던 과거 얘기를 반복할 뿐이다. 과거는 나눌 수 있지만, 미래는 나눌 수 없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알게 되면 반드시 동행이 생긴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자. 그리고 그 길을 가자.

창세기 12장 |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개요

창세기 12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람 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된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어떻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믿음을 갖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아브람을 통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창세기 12장부터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한장에 수백년이 압축되었지만, 12장부터는 수년으로 바뀐다. 기존의 성경해석과 다르게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아브람은 15:6에 의를 얻었다. 아브람은 12:1에서 15:6절 사이에 아브람은 어떤 상태인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브람이 의에 이른 믿음을 가진 건 15:6이다. 아브람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아보자.

요절 1. 창 12:1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 이야기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땅을 옮기는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알고지내던 사람들, 익숙해던 환경과 이별해야 한다. 아이들이 그런 이유로 이사하고 전학하는 걸 싫어한다. 또, 통치자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경선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자유로웠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통치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세상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이사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것을 보이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아브람이 이사간 것이 그 예이다.

기존에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것이 큰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아브람은 큰 믿음을 가진 상태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다. 근거는 창세기 15:6이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비로소 의에 도달한다.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어설프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모든게 다 이루어지는 줄로 이해한다. 믿음을 자기 확신, 자기 세뇌, 할수있다는 신념, 긍정적 사고방식 정도로 이해한다. 믿음을 생각의 힘을 발동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시작도 안한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기만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어야 한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문제의 근원이 ‘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다운 걸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데, 인간답지 못하다. 인간다운 게 ‘의’니까 인간답지 못한 건 ‘불의’이다. 성경에서 ‘불의’는 ‘죄’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죄’를 ‘나쁜 짓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죄가 맞다. 성경에서는 ‘나쁜 짓하는 것’도 죄고,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부모가 부모답워야한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 있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그게 ‘의’이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의’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아무짓도 안하면 ‘죄’를 안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자식도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할 도리가 있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부부로서,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등등 모든 분야에서 당연히 해야할 ‘의’가 있다. 하다못해 강아지에게도 지켜야 할 의가 있다. 강아지와 놀아주는 게 의이다. 안놀아주면 불의이다. 죄를 불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왜 지옥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기 싫어질 때가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했을 때이다. 언제 상처받고 실망하냐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이다. 불의의 문제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근본문제가 된다. 불의가 인간 문제의 근본 문제라고 동의할 때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해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한 건 아는데 자기가 불의한 건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감각이 죽어 있다. 자기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시작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기독교 믿음을 시작조차 못했다. 기독교 밖에서 기웃거린다. 기독교 밖에 있는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믿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요절로 돌아오겠다. 아브람도 자기가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믿음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믿음 교육을 시작하신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 가보지 않았던 여행의 출발, 하나님의 인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믿음의 결단이 아니라 작은 믿음 혹은 아주 가냘픈 기대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시작하게 되는 상황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마시라. 그것도 충분히 믿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떠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요절 2. 창 12:8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에서는 무조건 피의 제사를 지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긴 기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현상이다. 멀리서 보면 점선이 실선처럼 보인다. 철길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연결되어 보인다. 피의 제사를 지낸다고 무조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내는 기간도 있다. 피의 제사를 계속 지내면 믿음으로 인도되는 시점이 있다.

본문 뒤에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아브람의 실수 중 한가지가 아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엄선된 이야기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람 뿐만 아니라 성경의 위인이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의 예가 극적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지쳐서 결국에는 블레셋에게 망명한다. 불의를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망신을 주려고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무엘상 27:1-2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불의가 드러나야 한다면 의롭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 그런 사람은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의를 위해 핍박받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 의를 추구할 때 역설적으로 불의한 자신을 보게 된다. 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찾을 수조차 없다.

그 예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 교회는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제를 찬양하고, 독재 시대에 독재 정권에 아부했다. 그 결과 교회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통하고 있을 때, 안좋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의를 추구하지 않을 결과 불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단순히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믿음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의를 추구해야 믿음에 다가서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믿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정리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갈 때 믿음이 크고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믿음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큰 믿음이 있으면 좋겠지만, 크기보다 중요한 게 방향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 그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이 안내자를 따라갈 때 홀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적용

예배에 안 빠지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나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가정이 불화하고 직장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교회에 최적화되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몸만 피곤할 뿐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실제적인 것이 다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는 반드시 실제적이다. 당신이 교회에 최적화되었을 뿐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기 바란다. 그것이 아브람이 간 길이다.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의를 추구하기 바란다. 누구 덕 볼 생각하지 말고, 옳은 행동을 하기 바란다. 교회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분노하신다. 세상보다 못한 윤리의식을 가진 교회가 교회일 수 없다. 비교인보다 불의한 교인이 교인일 수 없다. 정신차리자.

20200628 성령님에 관한 오해 4. 방언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행 02:01-13

0. 방언 운동

성령님에 관한 오해 네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주는 방언 운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방언 운동이 1900년 미국 아주사에서 시작되었으니 120년 이상 지났습니다. 우리나라도 방언 운동의 파도를 결산을 해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 성령님에 관해서 알아보면서 방언 운동의 문제점을 짚어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02:01-13입니다.

사도행전 02:0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1.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방언 받아야 구원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이고, 구원을 받는 근거라고 했습니다. 강력하게 내세우지 않지만 아직도 그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방언을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방언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분들과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은 것이고 성령 세례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단순히 주장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리칩을 몸에 이식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은 베리칩 교를 믿고 있군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도 화를 냅니다.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는게 배리칩이 구원을 좌우한다면 그건 베리칩 교가 확실합니다. 방언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방언교이고, 베리칩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베리칩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베리칩을 몸에 이식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게 기독교입니다. 방언 안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해야 기독교입니다. 물론, 방언이나 베리칩을 주장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예수님도 믿고 방언도 해야 한다거나 예수님도 믿고 베리쳅을 이식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온리가 기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이게 기독교입니다. 예수 플러스 알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건 플러스 알파에 해당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성경에 오직 예수라고 기록된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누구나 오직 예수라고 말합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고 논쟁할 이유도 없습니다.

2.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되는가?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그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현상입니다. 왜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 방언은 완벽한 외국어였습니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가 이스라엘로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온 사람들이 자기 나라 언어를 알아들었으니까요.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 구절을 인용한 책 ‘하나님의 큰 일’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건 성령님의 취임인사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하면 현충원이나 국립묘지에 방문합니다. 그건 행동으로 보여주는 취임인사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로 외국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취임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오셨다는 의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방언을 주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 자신을 내세우려고 오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그 사실을 방언 즉, 외국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항상 방언을 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이 기록된 것이 사도행전에 4번 나옵니다. 2장 예루살렘, 8장 사마리아, 10장 가이사랴, 19장 에베소에서 입니다. 예수의 유언엔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방언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만 한 게 아니라 예언도 했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 하셨던 기적을 성령님이 똑같이 행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방언만 강조합니다. 다른 은사에 관해서는 입을 닫습니다. 지금도 병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하철 성형수술 광고에서 비포, 에프터를 보여주잖아요. 믿으라고 소리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비포, 에프터 사진을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 중에 그런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코로나 환자를 치료해서 비포, 에프터를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은사집회 광고가 싹 사라졌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을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3. 방언 운동의 결과는 무엇인가?

방언 운동의 결과는 어땠는가? 역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방언이 없을 때 기독교는 전세계에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방언을 하지 않았을 때 기독교가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반대로 방언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이후에 전세계에서 기독교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생각해 보아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발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방언 운동을 해서 기독교가 성장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방언 운동을 하면 일어나는 특징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기독교는 쇠퇴한다는 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방언 운동이 확산하면 교회 다닌다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교회가 교회가 아닌 곳이 되어버립니다. 목사의 말이 천박해지고 교인의 행동이 과격해집니다. 교회가 조금만 비판을 받아도 집단 폭력을 행사합니다. 각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자기 교회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하는 교회 이기주의가 강해집니다. 기독교가 강력하게 전파된 시대는 기독교가 힘이 강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힘이 약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자기 희생으로 세상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예만 들겠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이 장기려 박사입니다. 부산 복음병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고 자기 월급을 털어서 도와 준 일로 유명합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주시오.’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영양실조 환자에게 직접 썼던 처방전입니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적선으로 한 달 월급 수표를 주었다가 그 걸인이 수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습니다.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해 지불하기도 했고, 병원 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했답니다. 복음병원 초창기에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수대로 나누어 식구수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고 자신은 아들 하나뿐이므로 운전기사와 같은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1985년 남북관계의 일시적 해빙기에 정부가 배려하여 특별방북대상으로 선정하였으나 ‘나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방북을 사양한 일,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평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1968년에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최초의 의료보험 제도를 시행해서 오늘날 건강보험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표어가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였습니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우리나라 최초로 간절제술을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방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의사였고, 추진력 있는 행정가였고, 미래를 준비하는 개혁가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를 이끈 것은 방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 방언 운동은 어떻습니까? 삶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방언하면서 과격하고 무례하게 전도합니다. 억지로 교회 데려가고, 무조건 예배 많이 참석하게 합니다. 마음을 감동시키는 게 아니라 힘으로 굴복시킵니다. 방언 운동은 무엇을 남겼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게 했지만, 동시에 교회가 교회가 아니게 했습니다. 방언 운동은 교회를 소외시켰고 복음을 소외시켰다. 방언은 남고 복음을 사라졌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방언 운동을 지지하시는 분이 있다면 근거 없이 지지하지 마시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 방언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방언 연습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0621 성령님에 관한 오해 3. 성령의 사역 | 행 01: 06-11

0. 성령님이 오신 이유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성령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뭔가 신비한 능력을 받고 인생이 형통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받고 인생이 형통할까요? 그 답을 얻으려면, 성령님은 왜 오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왜 오셨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1장 6 ~ 11절입니다.

사도행전 01:06-11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본문은 8절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8절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시작합니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은 예수님과 바통터치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겨주면서 달리는 선수가 바뀝니다. 달리기 경주는 변함 없이 계속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과 바통터치하셨다는 것도 정확하게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던 일은 변함 없이 계속됩니다. 다만, 그 일의 주체가 성령님으로 바뀔 뿐입니다. 성령님은 이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신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다양하고 예민한 존재입니다. 기계를 다루듯이 대충 다룰 수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신중하게 도와야합니다. 예수님 혼자 많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도울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한사람한사람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장면이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 니고데모, 왕따 사마리아 여인, 어부 베드로, 세무 관리 마태 등 다양합니다. 성경은 그 사람들을 돕는 과정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를 돕는 과정을 대표로 보여줍니다. 중요한 건 사람을 도와서 변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화시키는데 만 3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만 중요했다면, 3년 반 동안 공적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3년 반을 활동하신 이유는 제자들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이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3년 반이 필요했다면 성령도 그 정도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3년 반이요. 제가 기존에 성경을 해석에 불만인 부분이 이런 점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고 해석하지 않는 점이요.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 같지만, 유기적인 연관성, 사건의 개연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8절은 요약된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단숨에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은 아니잖아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지는 않았잖아요. 즉 수 천년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시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요약해서 알려준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이라는 구절에는 성령께서 예수님처럼 우리를 만나고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무조건 권능을 받는 식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2. 성령의 권능 (1)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권능을 받을까요? 여기서 권능은 원어로는 뒤나미스, 영어로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단어보다 중요한 건 문맥입니다. 문맥적으로 권능은 증인이 되는 권능입니다. 막연히 어떤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권능은 헬라어로는 뒤나미스, 영어로는 power입니다. 힘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힘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단어보다 중요한 게 문맥입니다. 단어의 의미를 아무리 잘 알아도 문맥을 보지 안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문맥에 따라 해석하면, 여기서 권능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이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권능을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방언에 관해서는 따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만 드리겠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일까요? 방언하는 것이 어떤 능력일까요? 그것이 예수님이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방언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질까요? 그냥 성경에 그렇게 나왔으니까 그런 겁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방언에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장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데, 그 권능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 권능은 어떤 권능있까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권능일 것입니다. 돌려말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십자가 체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체험은 회심의 체험 혹은 자아의 죽음 등으로 불립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비롯해서 많은 경건한 신앙인이 십자가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했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 체험을 해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듯이 방언하게 되었다고 경건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인은 성령이 임해서 방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반대로 십자가 체험은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기독교인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방언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습니다. 방언을 연습하고 방언을 반복합니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뭔가 있다고 애처롭게 주장합니다. 현실에서 효과가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키우고 그 세력으로 거짓을 확산합니다. 방언에 신경쓰지 말고 진정한 성령의 권능인 십자가 체험에 신경을 쓰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권능이고 그것은 십자가 체험입니다.

3. 성령의 권능 (2)

성령의 권능을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사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성령을 강조하지 않아서 혹은 성령을 인정하지 않아서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방언을 안해서 일까요? 자꾸 질문만 하면 짜증나실테니까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행위계시로서 말씀계시인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은 성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행위계시가 지금도 일어나면 성경도 기록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성경은 요한계시록에서 종말까지 기록함으로써 종결을 지었습니다. 성경은 더이상 기록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행위계시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기적이 없다는 말입니까? 오늘날도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예수님의 약속,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이룰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기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로 인한 기적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행위계시로 오해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주의해서 일으키십니다. 기적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 만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좋을 것 같지만, 기적으로 인한 부작용도 있습니다. 기적이 자주 일어나면 의학 발전이 더뎌집니다. 일반섭리에 관한 신뢰가 무너져서 혼란이 옵니다. 병에 걸려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서 심각해 지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새로 기록하고, 교주가 되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려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20200607 성령님에 관한 오해 1. 성령 받는 법

0. 성령님에 관한 오해

기독교는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과 바통 터치하면서부터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부터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기적이 있어나고 신자가 늘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성령 받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번주부터는 이런 성령님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수정하겠습니다.

사도행전 01:01-05

1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1. 오해. 성령 세례는 갑자기 받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령을 받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에 집중하는데, 이게 완전히 초점이 빗나간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는 건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복음서를 봐야합니다.

모내기를 생각하면 좋습니다. 모판에서 모를 키운 다음에 모를 논에 옮겨심습니다. 모를 처음부터 논에 심으면 어린 모가 쉽기 죽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어집니다. 어린 모를 실내에서 키워서 튼튼해진 다음에 논에 옮겨심으면 모 하나하나가 잘 성장하게 되어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비슷한 패턴이 구약 성경에도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가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한 가정에만 집중하죠. 그러다가 이 가족이 급격하게 수가 능가해서 출애굽기에서는 한 민족이 됩니다. 창세기는 모판이고, 출애굽은 모내기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복음서가 모판이고, 사도행전이 모내기입니다. 창세기와 복음서는 개인에 관해 기록하고,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은 공동체에 관해서 기록합니다.

믿음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출애굽기가 아니라 창세기를 봐야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된 부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세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복음서를 봐야합니다. 신약 시대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부분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게 믿음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어떻게든 성령만 받으면 된다면 성경이 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긴 이유는 길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연장이고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갑자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간략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확장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 성장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설명된 걸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성령 셰례를 받는 것이 갑작스러운 것 같아도 전후 사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2. 오해. 성령 세례는 능력받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능력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오해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게 부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볼 수 있는 좁은 부분만 보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한 권의 책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해석하려고 해도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님은 예수님과 바통터치하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한마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복잡미묘합니다. 단순히 만나기만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격이 비슷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우리를 변화시켜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빨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가정 먼저 예수님을 닮은 인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능력을 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고난 중 형통의 훈련을 먼저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번영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 복음주의의 길을 계속 갈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과정을 예수님께 훈련 받았기 때문에 바로 사역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훈련 받지 않은 우리는 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3. 오해. 성령 세례는 기도해서 받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가 중요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많이하라고 강조합니다. 또 오늘날 은사로써의 기적은 사라졌지만, 기도로 인한 기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기도 만능주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령 세례는 기도 많이해서 받는 게 아니라 은혜로 받습니다. 기도 혹은 금식 같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주장에는 공로주의가 숨어있습니다. 돈을 내고 무엇을 사는 것처럼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성령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도 땅의 것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적당한 가격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타락합니다. 기도 많이 해서 혹은 금식 많이 해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항상 공로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로 하나님이 가진 물건을 사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자비를 구하는 호소입니다.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을 겸손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해서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간절히 기도해야 성령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4. 결론

복음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과정을 통과해야 사도행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성령의 순서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무조건 사도행전을 여러 번 읽고 기도하면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혼연히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200614 성령님 관한 오해 2. 성령의 이름

0. 성령님은 이름이 없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성령님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혼동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름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까? 성령님이 곧 이름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이름에 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03:11-30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1.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뭐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아닌가요?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아니라 호칭입니다. 선생님, 사장님, 목사님 같은 호칭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은 ‘여호와’입니다. 모음이 없이 자음만 전해지기 때문에 ‘야웨’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서명하실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라고 쓰지 않고 ‘여호와’ 혹은 ‘야웨’라고 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뭐죠? ‘예수’입니다. 동명이인이 있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에 ‘그리스도’라는 직함을 붙여서 사용합니다. 예수님도 서명할 일이 있으면 ‘예수’라고 서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이름은 뭘까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성령님을 “또다른 보혜사”라고 소개하시고, “내 이름으로 오실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미 알아보았기 때문에 확인만 하고 가겠습니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나와 있듯이 성령님은 예수님과 이름을 공유하십니다.

2. 더러운 영, 거룩한 영

성경에 성령이라고 나온 단어는 이름이 아니라 호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11절과 29절입니다. 11절에서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는 ‘프뉴마타 타 아카사르타’ 영어로는 ‘the unclean sprit’, ‘더러운 영’입니다. 29절에서 성령은 ‘프뉴마타 호 하기온’ ‘the holy spirit’, ‘거룩한 영’입니다. 프뉴마라는 단어에 꾸며주는 말을 붙여서 사용합니다. 어떤 ‘영’이 있는데, 이 영이 거룩하다 혹은 더럽다고 표현합니다. 두란노 비전성경경사전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프뉴마’란 낱말이 총 379회 등장하는데 275회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149회는 다른 단어와의 연결 없이 독립적으로 ‘프뉴마’만 사용되고 있고, ‘거룩한 영’이란 표현은 92회,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은 18회이다. 이외에도 ‘성결의 영’, ‘아버지의 영’, ‘그의 아들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의 표현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라는 중성 명사를 가지고 성령이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47회는 인간의 영을, 38회는 악한 영을, 9회는 죽은 자의 영이나 천사를, 그리고 3회는 바람 혹은 숨결을 의미하고 있다.

길에서 여러분이 사장님하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뒤를 돌아볼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요?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이 뒤를 돌아볼 것입니다. 착한 사람만 선물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만 올까요? 여러 사람이 올까요? 성령님 오십시오. 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영이 올 수 있습니다. 성령님만 콕 찝어서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정확한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를 부르시면 됩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셔도 됩니다. 예수님 이곳에 임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미안하지만, 거의 대부분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하셨는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영이 함께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3. 성령 모독

성령을 모독하는 것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독했습니다. 귀신이 귀신을 쫒아낸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낸 걸 모독하고 있으니까 예수님 모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성령 모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 모독은 예수님 모독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건,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안쓰는게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거룩하지 않은 영을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영을 시험하지 않고 무조건 추종하는 게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성령을 강조하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추구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00531 성령, 그리스도의 영

0.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성령님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활동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성령의 강림을 교회의 시작으로 본다.

성령의 강림이 교회의 시작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성령님과 바톤을 터치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시간도 제한된다. 그래서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성령님이 대신 오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이다.

성령강림절인 오늘 성령님이 오신 이유를 알아보겠다.

요한복음 14:16-21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1. 성령님은 누구신가? 알로스 파라크레토스

16절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겠다고 하셨다. ‘또 다른 보혜사’는 헬라어로 ‘또 다른’은 ‘알로스’인데, 종류가 같으면서 다르다는 의미이다. 종류가 다르면 ‘헤테로스’라는 단어를 쓴다. ‘파라클레토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돕는 자, 조언자, 변호사 역할을 하셨다. 그러니까 ‘또 다른 보혜사’는 ‘알로스 파라클레토스’이다. 예수님과 다른 분이지만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18-1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 너희에게 오리라”,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오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아니지만 예수님인 분. 이것이 성령님의 정체이다. 기독교계에는 의외로 성령님에 관한 연구가 따로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한 분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없을 뿐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진 분이 성령님이다.

2. 성령님은 왜 오셨는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성령님을 영접했을 때 그 영의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과 동일하다고 느낄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도행전을 3장을 보면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어서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성전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고쳤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던 것과 비슷한 일을 간 것이다. 기적만 예수님과 비슷하게 행한게 아니다.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와 비슷하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예수님이 하셨던 것과 비슷한 일을 했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인격과 비슷해졌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행하고 예수님의 가지셨던 인격을 갖추도록 돕기 위해서 오셨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일을 행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았다는 말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은 사실 성령님을 만난 것이다.

3. 주의할 점

성경은 성령을 가장한 가짜가 있다고 가르친다. 사기꾼이 있는 것처럼 사기치는 영이 있다는 말이다.

요한일서 4:1-3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초창기 교회에는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게 아니라 영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것을 직접 본 목격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존재했지만 육체로 존재하신 건 아니고 환성처럼 존재했다고 주장했다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11:4, 13-15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초창기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해서 많은 추종자를 가진 대형교회 목사가 있었다. 그 목사가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모욕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못 받아서 고생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 반박한 게 고린도후서이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고난 받는게 진리를 가진 증거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사탄이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사기꾼이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인격자인 것처럼 가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결국 사기를 치는 것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거짓 영도 자기가 거짓 영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인 것처럼 가장한다. 뭔가 능력을 주는 것처럼 다가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말, 더러운 말을 하게 하고 결국에는 돈 문제,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한다.

4. 어떻게 성령을 받을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성령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참고하자

요한복음 1:47, 말씀을 사모하는 자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셨다는 말은 성경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한복음 4:2, 예배하는 자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진정한 예배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4, 은밀하게 의를 행하는 자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은밀하게 구제하고, 기도하는 등 의를 행하는 자를 지켜보신다

성령을 받는 것은 단순히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능력을 준다는 영을 조심하자. 능력 받았다는 사람에게 속지 말자. 예수님의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20200517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4 | 좌절에서 벗어나는 법 | 눅 24:28-35

0. 좌절에 빠질 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확인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오늘은 좌절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정은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높이 올라가면 그만큼 깊게 떨어진다. 큰 기대를 품었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좌절이 빠진다.

좌절을 극복하려는 잘못된 방법

기대하지 않는 것: 경험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또다시 좌절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열정이 사라진다. 기대감이 없는 맥빠진 사람이 된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 현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엇나갈 수도 있다. 1992년 다미 선교회에서 그해 10월 23일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했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지도자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단 종파 여호와의 증인은 1914년, 1925년, 1943년, 1975년 종말을 주장했지만 틀렸다. 마찬가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좌절이 빠질 때가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우울증까지 올 수 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누가복음 24:28-35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 좌절에서 벗어나는 방법

1-1.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라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좌절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관점이나 자기 기대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좌절이 커진다. 근거 없이 내 생각이 맞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좁은 시각을 가진 것을 모른 채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일이 있다.

1-2. 시행착오를 당연시하라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실패라고 단정짓지 말라. 기대한 일이 한 번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대부분의 경우 성공은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온다. 시행착오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1-3. 피드백을 통해 발전하라

피드백은 내 행동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발전할 수 있다.

2. 예수님의 방법

2-1. 제자들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여러 번 가르쳤지만, 이해하지 못할 걸 아셨다.

2-2. 시행착오라고 생각하셨다.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시행착오라고 생각하셨다.

2-3. 피드백을 주셨다.

제자들에게 피드백을 주어, 변화하도록 이끄셨다.

3. 좌절은 성장의 과정

좌절은 고난이다. 고난은 나를 보게 하여 내면의 성장을 이끈다.

좌절했을 때, 자기 잘못을 탓하지 말라.

성찰을 통해 버릴 것을 버리고 보완할 것을 보완하며 발전해 가야한다.

예수님이 도우신다.

20200510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3 | 관점을 바꾸라 | 눅 24:13-35

0. 지금 나는 어떤 시기인가?

지금 시기는 2천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기간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기에 처해있으십니까?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끌려다니지 말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금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시기에 있던지 간에 예수님이 가르치려고 하신 그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13-35

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 무엇에 집중할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재교육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관점은 안경과 같고 잘못된 관점은 색안경과 같기 때문에 아무리 색안경을 벗고 깨끗한 안경을 써야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본질적인 변화를 주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방법을 알려주라는 말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든 다른 어떤 학문을 배우든 가장 중요한 건 관점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웠는데 이단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악한 사람 밑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보만 많이 배우고 잘 외우는게 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지난 날 광화문에서 열심히 시위하던 태극기 부대에 신학자, 목회자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바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한국교회사를 쓰는 사람이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 이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한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취급될 것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게 아닌데 왜 잘못된 행동을 했냐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고치려면 그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자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어떤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를 다 나쁘다고 하지만 정작 자기가 번영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기도 많이하면, 금식 오래하면, 능력 받으면, 전도 여러 사람하면, 교회 봉사 많이하면 그러면 형통한다 복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번영주의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말이 잘못된 게 없는 것 같죠? 그러니까 번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주의는 기도 많이하고, 금식 오래하고, 능력 받고, 전도 여러 사람하고, 교회 봉사 많이해도 고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관점입니다. 왜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발전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고난을 필수로 주시냐면, 그게 없으면 줄 수 없는게 있기 때문입니다. 초코렛을 포장할 때 은박지를 사용해야 잘 안녹습니다. 초콜렛을 휴지로 포장하면 엉겨서 먹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포,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그래프를 통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요셉과 제자들의 예를 들어서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2. 고난 중 형통한 사람들

요셉의 경우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일을 잘했으나 죄수가 됨

다윗의 경우

골리앗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나 사울에게 쫓김

예수님의 경우

제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3. 하나님은 리더를 만드신다

보스와 리더의 차이

보스는 자기한테 잘보이기만 하면 되지만, 리더는

하나님은 리더시고, 우리도 리더가 되기 원하신다

사람은 보스가 되고 싶어한다. 리더가 되려면 고난이 필수이다.

고난은 생각을 넓혀준다: 다른 처지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난은 생각을 명확하게 해준다: 대충하는게 아니라 절절하게 알게 한다.

고난을 생각을 높여준다: 생각의 찌꺼기를 제거한다.

20200503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2 | 관점을 바꾸라 | 눅 24:13-35

1.우선순위 –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지난 시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일이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우리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려는 제자들을 불러모아서 성경을 보는 관점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경 보는 관점을 세워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많이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닌 것처럼요.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예수님한테 직접 배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고 영광을 받아야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강조하셨고, 성경에도 그런 예언이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음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2. 각성 –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이 문제가 아니라 물을 가공하는 주체가 중요합니다. 색안경을 끼면 어떤 풍경을 보아도 색안경의 색으로 덮입니다. 풍경이 문제가 아니라 색안경이 문제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르쳐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고쳐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자기 관점이 명백하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면 고쳐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모아 재교육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자기들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이런 기회에라야 관점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3. 관점 – 고난을 통과한 영광

예수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주의 관점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관점입니다. 왜 제자들이 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받아들이기 싫어서입니다.

“기도하면 고난을 받지 않는다. 금식하면 형통한다. 능력받으면 물권, 인권, 영권이 따라온다”라는 주장을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이 센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복받고 구원받는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자기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게 기독교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은 유신론자일 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성경의 관점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까요? 제가 강의할 때 사용하는 그래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프

4. 위기는 기회 – 번영주의에서 벗어날 때

능력 있다는 교회, 설교가 좋다는 교회, 성령 충만하다는 교회, 영성이 있다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가정이 불화하고, 결혼을 잘못하고 등 여러 경우를 보았습니다.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불행했습니다. 아니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형편이 더 나빠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영주의의 말로입니다.

번영주의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합니다. 형편이 나쁠 때가 기회입니다. 내 생각이, 내 관점이 틀렸구나라고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내 안의 감추어진 번영주의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시작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0426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 | 관점을 바꾸라 | 눅 24:13-35

0. 예수님은 부활 후 무슨 일을 하셨나?

안녕하세요? 장춘권 목사입니다. 교회 절기로는 부활절이 지나고, 성령강림절을 향해 가는 기간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아보려고 합니다.

큰 일을 겪으면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암 수술을 마친 후에 건강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건강식품을 잔뜩 구입한다거나, 몸이 안 좋아지면 운동을 안하던 사람이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통 사고를 당한 사람은 차를 살 때, 디자인보다 안전성을 더 따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겪은 후에 하는 행동을 보면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행동을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뭘 중요하게 여기셨을까요?

복음서 마지막 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 후에 하신 행동이 잘 나와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모아서 성경을 재교육하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성경을 재교육하셨다는 점이 아니라 이때 성경 재교육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교육하셨다는 데 점이 중요합니다.

신천지, 구원파, 통일교 등 이단들도 정통교회와 같은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왜 이단이 되었을까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색안경과 같습니다. 생각의 색안경입니다.

바람직한 건 색이 없고, 깨끗하고, 도수가 딱 맞는 안경이겠죠? 하나님이 주신 안경을 써야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안경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24:13-35입니다.

누가복음 24:13-27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1. 흩어진 제자 찾기(13-24)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여행을 못하니까 안식일 다음날 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확인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소문을 안 믿은 겁니다. 또 32절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한 부분을 보면 열정이 사라진 이유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열정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귀차니즘에 빠지고, 무기력해 집니다. 제자들이 그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비슷했습니다. 좌절로 인해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죠. 그러면서 맞춤형 처방을 내리십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제자마다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내린 처방과 지금 글라바와 다른 한 제자에게 내린 처방이 세부적인 면에서는 좀 다릅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공통적인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공통적인 처방은 바로 ‘성경 재교육’이었습니다.

2. 성경 재교육: 관점 교육(25-27)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여기서 선지자들은 성경을 의미합니다. 밑에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이죠.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내용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입니다. 글로바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좌절하고 절망했냐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들에게 이해가 안되었고,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잘 믿으면 복받고 형통하고 구원받는다” 이 말이 좋으세요. 아니면, “예수님 잘 믿으면 고난을 받다가 영광에 들어간다” 이 말이 좋으세요. 앞에건 번영주의고, 뒤에 건 복음주의입니다. 비슷한 거 같지만 정반대의 관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잘 믿으면 복받고 형통하고 구원받는다”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번영주의를 믿은 거죠. 그런데, 예수님 잘 믿으면 무조건 복받고 형통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충격에 빠진 겁니다.

복음주의의 관점은 “예수님 잘 믿으면 고난을 받는다”입니다. 물론 구원 받지만 구원은은 죽은 후의 문제니까 고난 받는다는 부분에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기 겁나는데요” 하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합니다. 종교라는게 잘 살고 형통하려고 믿는 거니까요. 점을 치고, 절에 가고, 교회 다니는 이유가 다 그렇죠. 그래서, 단순히 교회 다니는 거와 예수님을 믿는 건 종교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겁겁니다.

다행인 것은, 성경에서 가리키는 ‘고난’이 단순히 ‘고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것”이라고 하셨죠? 영광이라는 건 경험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시행착오가 쌓였을 때 도달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그런 경험 혹은 시행착오를 성경에서는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쨌든, 고난은 영광광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고난은 필수적인 것이니까 피하려고만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고난 없이 성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고난 중 형통’이 있습니다.

3.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책은 결국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성장을 통해서만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성숙은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시종으로 일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신 것이라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게 진정한 형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노예에서 죄수로 형편이 더 안좋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고, 형통하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서, 죄수로서 고난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요셉이 성장한 결과는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총리는 이인자입니다. 바로와 애굽 백성 중간에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바로 쫓겨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요셉이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총리를 시켜줘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예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고난을 주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성장해야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고생이라고 생각해서 빨리 벗어나려고 하거나 좌절하고 절망하면 안됩니다.

고난이 영광으로 가는 필수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걸 알 때, 신비한 일이 벌어집니다. 고난 중에 형통하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과정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 과정 안에서 놀라운 인도를 받게 됩니다. 복음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내명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4. 예수은 부활 후 성경보는 관점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흩어졌던 제자들을 모아서 재교육하셨습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고난을 무서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제자들, 고난 때문에 절망, 좌절한 제자들에게 그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번영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입니다. 고난의 불가피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기도 많이하고, 금식하고, 능력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선동한 결과입니다. 기도 많이하고, 금식 오래하고, 능력 크게 받아도 고난을 통한 성장이 없으면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스스로 변화가 없고, 가정이 불화합니다. 겉보기에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도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가 없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은 성장으로 가는 필수과정이다. 이렇게 알려주시면서 성경을 이런 관점으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삶의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329 그 예배를 멈추라: 코로나19과 예배

0. 하나님은 무조건 예배 드리는 걸 좋아하실까?

이사야 01:13-17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 그 예배를 멈추라라

2. 멈추라고 하신 이유는?

3. 내가 교회다

20200322 신천지가 공략한 한국교회 약점3: 근본주의, 비상식

김세윤,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 못지않게 근본주의 신학도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며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이란 성경의 문자적·율법적 해석에 기반을 둔 신학을 말한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정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율법적으로 적용하려는 근본주의 신학으로부터 성숙해서 나와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릴까 봐 성경 비평을 꺼리는 근본주의 경향이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다. 성경의 본문들이 그들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황 속에서, 그리고 그 본문이 나타나는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또는 문학적 틀 속에서, 무슨 뜻을 가진 것인가를 고찰하지 않고, 그냥 그들만 뚝 떼어 기록된 문자대로만 읽고, 그것을 율법적으로 적용한다. 성경을 이렇게 읽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할 수 없어 기독교 신앙을 통해 겨우 전래된 교리 몇 가지를, 그것도 그 뜻을 깊이 새기지 못한 채 몇 가지 ‘하기’와 몇 가지 ‘안 하기’를 실천하는 정도의 신앙생활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올바른 영성을 증진하며,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그렇게 많고, 그들 중 상당수는 세상적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인하여 기독교적 정신과 윤리를 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 노릇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본문들 몇 개를 임의로 뽑아 서로 짜맞추어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어긋나는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이단들의 밥이 되기 쉽다. 그런 이단들이 성경 본문들을 들이대면서 그렇게 만들어 낸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하면, 평소 성경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도록 가르침 받고, 성경의 본문들을 그저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만 읽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를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 교리가 이단들이 제시하는 대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쓰여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단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교회에서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읽도록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을 노린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한국의 성도들이 이단들의 제물이 되고 있는가?! 한국 교회의 강단을 돌아볼 때 성경의 문자적, 율법주의적 해석과 함께 알레고리적 해석의 경향도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사들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과 알레고리적 혹은 영해적(靈解的)인 해석, 이 양 극단을 편의에 따라 왔다 갔다 하면서 해석하고 설교한다. 과거 한국 교회는 알레고리적 설교에 치중했다. 목사들이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그것은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한국 교회의 예화 중심적 설교의 문제다. 목사가 성경 몇 구절들을 읽고는 그것을 강해는 하지 않고, 온갖 그럴듯한 예화들, 때로는 본문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것들, 또 때로는 조작된 인상을 주는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알레고리적 설교나 예화 중심적 설교도 목사들이 결국 신학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을 습득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들이다. 목사들이 감동을 주어 (한국 개신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은혜로워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여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깊고 바른 영성 위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능력과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추어 가기를 바란다.

20200209[생각] 다르게 살고 싶다 | 생각을 바꾸자

0. “죽고 싶어” → “다르게 살고 싶은 거겠지”

1. 다르게 살려면 생각을 바꾸자.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생각을 넓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구도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생각은 바꾸는게 아니라 넓히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을 포괄해라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연설 “우리는 절박함 속에 미(美)를 사랑하며 탐닉함이 없이 지(知)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일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을 깊이 부끄러워한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기쁨, 슬픔, 자랑, 자책, 용기, 좌절 이유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생각을 내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닐 수 있다. 독재 국가 사람들이 수령님을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섬뜻한 이유는 그들이 하는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세뇌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공부를 못하면 부끄러워하는데, 그런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니다. 감정이나 마음도 생각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백락청 교수의 ‘이방인’ 평론. 부조리에 관한 글이었지만, 식민지 사람에 대한 무시를 깔고 있었다.

2.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 생각이 넓어진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보자

진화론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힘이 정의고 선이다.

정의롭고 선한 신이 없다면 정의도 선도 없다. 정의가 승리할 것이고 선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희미하게나마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진화론의 가장 큰 난제는 삶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 사는가? 그냥 산다. 살기 위해 산다. 살았다가 죽었어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의미가 없다.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라고 하는 시간, 공간의 시작 이전에 하나님이 존재했다는 의미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다면 그 외로운 분투를 인정해 줄 존재가 있다는 의미

4. 다르게 살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왜 죽고 싶은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

좁은 생각, 모호한 생각,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20200223 [징조] 시대를 분별하자 1

0. 신천지, 코로나19, 전광훈

코로나19로 인해서 영상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미 올해 2020년부터 유튜브로 영상설교를 시작했고 유튜브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생각했지만, 유튜브와 영상제작에 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망설였고, 또 이런 시도를 비난하지나 않을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설교를 시작하고 보니,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되었고 다른 교회에서도 영상을 통해서 설교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걱정하던 것들이 사라지게 되어서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영상설교로 인도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는 그 이유를 꼭 이루겠습니다. 영상을 통한 설교 혹은 예배는 단순히 설교나 예배를 영상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빠르고, 감각적이고, 흥미를 요구하는 세대들의 요구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이런 요구에 결합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루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동참하고 격려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오늘은 시대의 징조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심하고, 사회적으로 코로나19가 신천지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시대를 분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입니다. 성경과 교회사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적절한 구절은 누가복음 12:54-57입니다.

누가복음 12:54-57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1. 외식하는 자여

예수님께서 자연현상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것처럼, 시대를 상황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어딜까요?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느냐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 즉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성경 해석을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성경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는 거짓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오늘날로 비교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신천지는 이단이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돌려말하지 않겠습니다. 요즘 광화문에서 정치집회하는 정치 종교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정확하게 바리새인들과 일치합니다. 종교지도자는 독재에 대항한다면서 자신들이 독재를 합니다. 추종자들은 그런 종교지도자를 추종하면서 거짓과 악독에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들의 성경해석만이 옳다는 독선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들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할 때 잘 기억했다가 멀리해야 합니다.

2.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지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인데, 왜 분별하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분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기 힘듭니다. 자기 목소리도 자기한테만 다르게 들립니다. 다른 사람은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소리만 듣지만, 자신은 몸의 진동으로 전달된 소리도 듣기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로 지구에 가까이 그러니까 딱 붙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분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떨어져야 합니다. 좀 떨어져서 보는 것을 객관화라고 합니다. 물건이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물러서서 보고, 자기 목소리를 알고 싶으면 녹음해서 들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도 달에 비친 둥근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지구가 둥글다고 유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는 객관화가 가능해야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외식하는 자 즉 바리새인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합니다. 객관화가 매우 힘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자기 시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본문 앞 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특정한 종교행위는 잘 준수하지만, 전체적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특히 돈에 관심이 많아서 십일조를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돈에 대한 몰입이 더 중요한 공적인 의무는 무시하도록 했습니다.

3. 우리나라 교회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권 시대에 보수교회가 민주화 운동을 한 예가 전혀 없었습니다. 70-90년대에는 정 정권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 순종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정당한 투표로 선출된 정권에 대해서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전처럼 고문당하고 감옥갈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에서 시위하지 말라고 했으면, 지금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참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일관성 있는 행동입니다.

요즘은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천지의 공격이 심각하지만, 가까이는 세월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구원파로부터 정명석, 통일교, 천부교 등 강력한 이단이 끊임없이 일어났었고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앞으로도 또다른 이단이 동일한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잘 극복해 왔습니다. 따라서, 공포에 휩싸이면 안됩니다.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교회지도자들이 공포을 조장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4.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 시대의 문제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엄밀하게는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종교행위는 엄격하게 지키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은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락을 감추기 위해서 반정부운동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에 뛰어들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쇠락하는 건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나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교회의 타락이라는 내부 요인이 교회의 쇠락을 가져왔습니다.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종말에 자연재해와 사건사고가 있어나는 이유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신 이유도 자신을 바라보라는 자기 객관화의 촉구였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옳은 것을 분별하십시오. 과몰입되어 있는 영역이 있다면 한 발짝 떨어져서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남을 비난하는데 해결책은 없습니다. 내 자신을 개혁하는데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0301 [징조] 시대를 분별하자 2

0. 왜 한국교회는 신천지보다 정부를 미워할까?

코로나19에 관한 외부의 시선_포린폴리시

생각 노예

우상 숭배

요한복음 0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1.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바리새인: 노예임을 모름

한국교회

독재시대의 노예

생각의 노예임을 모름

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한국교회가 노예인 증거

신천지보다 정부를 더 미워함

전광훈 집단을 옹호

3.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4. 자기객관화는 죄의 각성